지금의 인사청문회와 비슷한 제도가 고려ㆍ조선시대의 서경(署經)이었다. 서경이란 국왕이 관료를 임명하면 대간(臺諫ㆍ사헌부, 사간원)에서 심사해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제도였다. 지금의 인사청문회에서 청문 결과 이상이 없으면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는 것처럼 대간에서 죽 둘러앉아 심사하는 원의(圓議)를 거쳐 임용 동의여부를 결정했다. 임용 자체를 거부하면 ‘작불납(作不納)’이라고 썼고, 조건부로 동의하면 ‘정조외(政曹外)’라고 썼다. ‘한품자(限品者)’는 일정 품계 이상은 승진시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서경도 명암이 있었다. 문제 있는 인물의 관직 진출을 봉쇄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조상의 흠을 뒤져 관직 진출을 막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서경 때는 본인의 나이와 본관(本貫) 및 삼대(三代), 즉 증조부, 조부, 부친의 이름을 쓴 고신(告身)을 제출한다. 문제는 조상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그 조상들의 계보를 상고해서 혹 한미한 곳의 출신이거나 혹 허물이 있으면 고신(告身)에 ‘작불납(作不納)’ 세 자를 쓴다(『태종실록』 8년, 2월 4일)”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본인에게는 문제가 없어도 조상들의 신분이 한미하거나 첩의 자식일 경우 서경을 거부했던 것이다. 조상들의 세계(世系ㆍ조상의 계통)를 적은 문적(文籍)을 ‘작(作)’이라고 하니 ‘작불납’이란 조상들의 신분 때문에 등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조외(政曹外)는 ‘정조(政曹)’ 외의 관직에는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관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吏曹)와 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병조(兵曹)를 정조(政曹)라고 하는데 이 두 부서에는 임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세종 18년(1436) 박욱(朴彧)이 도절제사의 도사(都事)가 될 때 그 할머니의 흠절로 고신에 서경할 때 ‘정조외’라고 썼다는 기록이 있다. 할머니의 문제란 남편을 잃고 재가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후손의 벼슬진출을 미끼로 여성의 재가를 금지하는 나쁜 사례였다.
그러나 조상 문제로 자손의 관직진출을 막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장리(贓吏)의 자손이 이에 해당한다. 장리란 뇌물을 받거나 부패한 관리를 뜻하는데, 장안(贓案), 또는 장리안(贓吏案)이라고 불리는 명단을 따로 작성해서 관리했다. 장안(贓案)에 오르면 대사면령이 내려져도 제외되었으며 자자손손 벼슬길을 막았다. 조상의 신분이 낮다고 서경을 거부하는 것이 서경제도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장리 본인은 물론 그 자손까지 벼슬길을 막음으로써 벼슬을 축재의 수단으로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서경제도의 장점이었다. 누가 몇 푼의 돈과 자손의 미래를 바꾸겠는가? 그런데 『성종실록』 4년 4월 28일자에 “비록 장리(贓吏)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이라도 대성(臺省ㆍ사헌부, 사간원)이나 정조(政曹) 외에는 혹 동반(東班ㆍ문관)에 서용된 경우도 있다”는 기록처럼 그 자손들이 조건부로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고려시대 때는 1품부터 9품까지 모든 벼슬아치가 서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서경제도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겪었다. 태조는 즉위년(1392) 10월 자신을 지키던 시위군관들을 1계급씩 특진시키려 했지만 대간에서 거부하자 서경제도를 손보기로 마음먹었다. 1품부터 4품까지는 대간을 거치지 않고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관교(官敎)와 5품 이하의 관료들만 대간에서 서경하는 교첩(敎牒)으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대간에서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정종 1년(1400)에는 고위관리도 서경을 거치도록 고쳤다가 태종 13년(1413) 다시 태조 때의 제도로 되돌아갔다. 세종 초에 다시 모든 관료들을 서경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고쳤다가 세종 5년(1423) 다시 5품 이하 관료만 서경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이것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그대로 올랐다. 이는 모든 관원을 서경대상으로 삼은 고려시대보다 크게 후퇴한 것이었다. 우리는 고려시대가 조선시대보다 못한 것으로 지레 짐작하지만 성호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 ‘고려진정(高麗賑政)조’ 에서 조선과 고려의 백성 구휼 정책을 비교하면서 “백성을 우대하는 정사가 지금(조선)에 비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었다.”라고 칭찬한 것처럼 고려 때의 정치가 나은 점도 많았다.
최근 여당 일각에서 인사청문제도를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현재의 인사청문 제도는 지난 2005년 당시 야당이었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주장을 여당이 수용해 모든 국무위원들까지 확대된 것이라는 사실은 논외로 치자. 최근의 청문과정을 지켜보면 저렇게 한결같이 하자 많은 인물들만 고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옛 서경제도에 비추어보면 두말할 것도 없이 ‘작불납(作不納)’에 해당하는 인물들뿐이었다. 제도 탓을 하기 전에 사람 찾는 노력이나 제대로 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자신들의 울타리만 벗어나 찾으면 당당한 이 나라에 사람이 그렇게 없겠는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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