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현대자동차가 10조5,500억원에 낙찰 받으면서 끝난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 부지 입찰과 관련해 한국전력 직원들에게 함구령이 내려졌습니다. 구구한 소문이 나도는 삼성전자 입찰 가격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삼성전자의 입찰가를 아는 사람은 삼성 측과 입찰 시스템(온비드)을 운영 중인 자산관리공사(캠코) 담당자, 그리고 한전의 본사이전추진단 관계자들뿐입니다. 한전 고위관계자는 “워낙 중요했고 민감한 문제여서 회사 안에서도 특별히 조심하고 있다”며 “만약 한전에서 가격이 흘러나갔다는 말이 나올 경우 한전의 신뢰도가 영향 받는 것은 물론이고 현대차, 삼성 두 회사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현대차와 삼성전자는 모두 지난주 입찰결과를 두고 겉으로는 ‘잘했다’ ‘다행이다’라며 결과를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모습입니다. 현대차 관계자들은 ‘너무 크게 쓴 거 아니냐’는 걱정에 “정몽구 회장이나 실무진이 상대방 ‘패’를 다 알았고, 5조~6조원 선에서 하자는 실무진 의견에 정 회장이 어차피 한전 땅 사는 돈은 국가로 갈 것이니 과감하게 입찰하라고 지시 해 만들어 진 결과”라며 여유를 보이고 있습니다.
삼성 관계자들 역시 이재용 부회장이 입원 중인 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서 상대방(현대차)이 공격적으로 입찰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판단한 결과 굳이 맞대응 할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이 내용이 정말이라면 양측 최고 결정권자들은 과감히 던지는 배짱과 포기할 때에는 잠시의 망설임도 필요 없는 냉철함을 지닌, 마치 홍콩영화 전성기 시절 주윤발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도신’ 의 승부사들 같은 실력자인셈이죠..
하지만 재계 안팎에서는 양 측 모두 적잖은 충격을 받았으면서 이를 숨기고 있고, 머지않아 이번 인수전 실무 담당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긴 현대차는 상대방의 정보 파악 실수로 너무 많은 가격을 써내 ‘출혈’이 생겼고, 삼성은 현대차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준비했고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는 땅인데도 상대방에게 작전(입찰가 정보)을 노출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지적입니다. 삼성은 낙찰 후 기자 간담회를 열어 청사진을 내놓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봐서 충분히 이길 것이란예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 삼성 측이 일부러 실제 입찰 가격보다 낮은 금액을 썼다는 소문으로 현대차 측을 배 아프게 하려 한다거나, 현대차에서 삼성이 예상보다 높은 가격으로 쓸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뒤늦게 그 이상 가격으로 입찰했다는 등 수많은 소문과 후일담이 인터넷에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정확한 사실은 현대차가 써 낸 가격과 삼성전자가 입찰에 참여했지만 현대차보다 적은 금액을 써냈다가 떨어졌다는 것뿐입니다. 이번 입찰은 땅 주인 한전이 미리 제출한 예정가격만 넘기면 되고 상한선은 따로 없이 높은 가격을 써낸 곳이 이기는 승부였습니다. 게다가 이긴 쪽 입찰가만 공개되고 지는 쪽은 알리지 않을뿐더러 온라인에 접속해 마감 시간 전에 가격을 입력하면 되는 방식이라 현장 분위기를 보고 임기응변을 하는 일반적인 오프라인 입찰 보다 상대방 정보를 파악하기 훨씬 힘들었습니다.
사실 부담이 더 컸던 쪽은 현대차였습니다. 현대차는 한전이 이사회를 열어 입찰 방식을 결정하던 7월 17일. 결론이 나기도 전에 30개 계열사를 한 데 묶는 통합사옥 형식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짓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습니다. 다분히 삼성을 의식한 행동입니다.
삼성은 몇 년 전부터 한전 부지에 대한 개발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2009년 삼성물산은 포스코와 짝(컨소시엄)을 이뤄 한전과 바로 옆에 있는 서울의료원, 한국감정원 부지에 초고층빌딩 3개와 호텔, 쇼핑몰 등이 포함된 초대형 복합단지를 짓겠다고 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동네 이름도 삼성동이고, 이건희 회장의 집도 근처에 있습니다. 삼성은 실제로 입찰 마감 날에서야 참여 했다는 사실을 알렸을 만큼, ‘연막 작전’을 쓰며 현대차의 애간장을 태웠습니다.
반면 현대차는 원래 서울 성수동 삼표레미콘 땅에 110층짜리 사옥을 지으려다 고도 규제로 무산됐고, 뒤늦게 대체 부지를 찾다가 한전 땅을 노리게 됐습니다. 때문에 현대차 측은 ‘우리는 정말 이 땅이 필요하다’ ‘상대(삼성)는 서초에 통합사옥을 지었기 때문에 이 땅은 부동산 투자용 정도로 여기고 있다’ 등 자신의 절박함과 상대방의 불필요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썼죠.
심지어 현대차는 입찰가격이 한전의 예정가보다 낮으면 입찰이 무산된다는 사실 때문에 입찰 경쟁의 과열 분위기를 틈타 한전이 한몫 챙기려고 말도 안 되는 예정가를 써낼까 봐 ‘왜 예정가를 공개하지 않느냐’며 한전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전은 이전에 발표했던 땅 감정가와 같은 금액(3조3,340억원)으로 예정가를 써내 현대차를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차와 삼성전자의 이 같은 신경전은 입찰이 끝났어도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만 알고 있다는 삼성전자의 입찰가가 세상에 알려지면 둘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이고 패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삼성이나 현대차 모두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알려지면 ‘판도라의 상자’ 처럼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되니까요.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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