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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꿈, 스케이트보드 신세계로 날아오르다

입력
2014.09.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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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타운 & 스케이트보드

쇠락한 해변마을 아이들, 파도 없는 날이면 보드 들고 버려진 저택 수영장 순례

1975년 모던 보드 신기원

Z보이스의 14살 막내로 대회서 보드 잡고 360 회전 등 누구도 알지 못한 기술 창조

'100% 보더의 삶' 문신

스타된 팀원들과 달리 감옥 전전, 상업적 유혹에는 흔들리지 않아

스케이트 보드 매니아들은 제이 애덤스를 '오리지널 시드'라는 애칭으로 기억한다. 모던 보드 기술의 원형을 만들어 낸 씨앗이라는 의미다. 그는 보드 위에서 행복했고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한계와 억압에 맞섰다. 스케이트 보드가 직업이 되고 상업화할 때에도 그는 끝내 고독한 제왕으로 남았고, 그 순정을 전 세계의 보더들은 기린다. 허핑턴포스터
스케이트 보드 매니아들은 제이 애덤스를 '오리지널 시드'라는 애칭으로 기억한다. 모던 보드 기술의 원형을 만들어 낸 씨앗이라는 의미다. 그는 보드 위에서 행복했고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한계와 억압에 맞섰다. 스케이트 보드가 직업이 되고 상업화할 때에도 그는 끝내 고독한 제왕으로 남았고, 그 순정을 전 세계의 보더들은 기린다. 허핑턴포스터

“지난 200년간 미국의 테크놀러지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거대한 시멘트 바닥을 아무 생각 없이 창조했다. 그 공간의 잠재력을 발견한 것은 11살 소년들의 영혼이었다.”(스테이시 페렐타, 1975)

페렐타는 2001년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관객상을 탄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도그타운과 Z보이스(Dogtown and Z-boys)’의 첫 장면을 저 문장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남쪽 베니스의 해변 슬럼 ‘도그타운’과 ‘Z 보이스’라 불린 소년들, 또 그들이 스케이트보드로 이룬 도전과 성취를 보여준다. 그 다이내믹하고도 저릿한 이야기의 중심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도그타운이라는 토포스(Topos)와 Z 보이스의 에토스(Ethos)를 보드 위에 얹어 세상 밖으로 이끌고 나온 존재가 있다. 모던 스케이트보드의 전설이자 전세계 보더들의 우상, 제이 애덤스(Jay Adams)다. 그가 8월 14일 숨졌다. 향년 54세.

1975년 반 캐딜락(Bahne-Cadillac)이라는 한 보드회사가 스케이트보드 전국대회 ‘델 마 내셔널스’를 연다. 딱딱한 클레이 바퀴를 대체할 우레탄 재질의 바퀴가 막 등장해서 보드의 인기가 조금씩 달아오르던 때였다. 50년대 말 등장한 스케이트보드는 60년대 서핑의 보조 레포츠로 10대들 사이에서 반짝 주목을 끌다가 갓 등장한 요요나 훌라후프, 또 롤러스케이트의 인기에 밀려 외면당해오던 시절이었다. 파도의 거친 동력도 없는 시멘트 바닥에서, 또 널빤지 위에 두 다리를 가둔 채 오직 중력과 몸의 움직임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스케이트보드의 제약에 시큰둥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 때까지 사람들은 보드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대회 프리스타일 부문. 운동복 차림의 선수들은 보드 위에 물구나무를 서거나 한 자리에서 두세 바퀴씩 회전하는, 아이스 스케이트나 초보적 아크로바틱 수준의 기량들을 선뵀다. 거의 막판에 출전한 Z보이스의 14살 막내 제이는 당시로선 듣도보도 못한 자세와 테크닉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치렁치렁한 금발에 반항기 어린 시선, 허름한 청바지. 그는 마치 파도 위에라도 선 듯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몸을 흔들어 아스팔트 위에 너울을 만들며 나아갔다. 그러다 답답해지면 양 손으로 보드를 잡고 메뚜기처럼 콩콩 뛰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컴퍼스처럼 보드와 몸을 360도 회전시키면서 그 관성으로 돌진했다. 대회의 룰도 평가에도 관심에 없는 듯, 가로세로 10미터의 경기장을 벗어나 바깥으로 내닫기도 했다. 그는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창조를 했다. 당혹스러워하던 심판진은 그에게 3위를 주지만 세상은 오직 그를 기억했다. 대회에서 비교적 ‘온순한’ 경기를 펼친 Z보이스의 유일한 여성 멤버 페기 오키는 여성부문 1등을 차지했고, 77년 스케이트보드 전미 챔프 토니 알바는 4위였다. 당시 보드 잡지 ‘스케이트보더’의 한 기자는 “그들(Z보이스)은 스케이트보드팀이 아니라 거리의 갱에 가까우리만치 공격적인 연기를 펼쳤다”고 썼고, 편집장 워렌 볼스터는 “(…)세상은 Z보이스를 만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고 썼다.

저 75년 전설의 에토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그타운을 알아야 한다.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서부의 코니아일랜드라 불릴 만큼 뜨거운 바다였던 베니스는 남쪽 산타모니카가 개발되면서 급격히 쇠락한다. 해안을 따라 내닫는 롤러코스터가 자랑이던 베니스오션파크는 67년 문을 닫았고, 마을은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 방화광, 소수의 예술인들이 머무는 슬럼이 됐다. 그렇게 죽어가던 원드랜드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서퍼들이 있었다. 도그타운의 거친 파도와 그 파도를 타고 잔교의 좁은 교각 사이를 곡예하듯 누비는 거친 서핑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서핑이 반사회적 스포츠의 대명사로 꼽히던 시절이었다.

거기 제프 호(Jeff Ho)와 스킵 앵블럼(Skip Engblum)이 있었다. 보드 디자이너겸 광적인 보더였던 둘은 72년 ‘제파(Zephyr) 프로덕션’이란 이름의 보드매장을 연다. 그들의 모토는 ‘유니크(Unique)’였다. 보드도 달라야 했고, 보딩도 그냥 잘 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스타일이 있어야 했다. 그들의 지향이 훗날 ‘도그타운 스타일’의 바탕이 된다.

파도가 없는 날이면 도그타운의 아이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버려진 경사로의 슬라롬 쯤은 이미 시시해진 그들이었다. 그들은 인근 학교와 저택들의 수영장에 주목했다. 마침 70년대 캘리포니아 대가뭄이 닥쳤고, 주당국은 제한급수와 함께 모든 수영장의 사용을 금지했다. 매끄러운 바닥과 ‘개 밥그릇(dog bowl)’처럼 오목한 곡면, 중심에서 림(rim)으로 갈수록 수직에 가깝게 휘어져 오르는 곡면이 그들에게는 야수 같은 파도를 연상시켰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전대미문의 도전들, 보드에서 떨어지지 않고 수영장 벽을 타고 오르고, 벽을 넘어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반대편으로 내닫기도 하고, 파동을 그리며 벽을 따라 돌기도 하고…. 빈 집을 찾아 다니며 때로는 수영장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물을 퍼내기도 하면서, 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쫓기기도 하면서, 그들은 다양한 형태와 곡면의 수영장들을, 또 새로운 기술들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쟁적으로, 하나하나 개척하고 정복해간다.

75년 대회 전에 이미 그들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던 보드의 세계를 몸으로 구현한 괴물들이었다. 대회 직전 제파 프로덕션은 그들 중 최고의 12명으로 ‘제파 스케이트보드팀’을 꾸린다. Z보이스는 그렇게 탄생했고, 제이는 그 팀의 막내였다. 제프 호는 2001년 ‘LA위클리’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제이는 누구도, 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동작들조차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시도하곤 했다. (보드 위에서) 그는 한 마디로 물처럼 흘렀다(fucking flow).”

제이 애덤스는 1961년 2월 3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났다. 마약중독자였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직후 가족을 버렸고, 한 살의 그는 공장 직공이던 어머니와 서퍼였던 양부 켄 셔우드와 도그타운으로 이사한다. 75년 두 사람이 이혼할 때까지 켄은 제이를 보살폈고, 제이가 네 살 때부터 보드를 가르쳤다고 훗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제프 호가 제이를 처음 만난 것도 그가 채 열 살이 안 됐을 때였다. 그가 ‘LA타임스’인터뷰에서 들려준 이야기. “60년대 말이었는데 제이는 내가 본 최연소 서퍼였어요. 서핑을 하던 중인데, 한 꼬마가 보드를 들고 내게 오더니 ‘당신이 제프 맞죠? 당신의 서핑 스타일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어요.” 훗날 그는 스케이트보드 위의 제이를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75년 대회는 스케이트보드의 붐으로 이어졌다. 60년대의 핫 매거진 ‘Scateborder’가 복간돼 파라 파세트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보딩 장면이 표지를 장식하고, Z보이스 멤버들은 10대들의 우상이 돼 CF에 출연하고 영국 등 해외 무대에 초청되기도 한다. 동시에 유명 스포츠브랜드의 보드시장 진출이 본격화한다. 자본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스케이트보드팀 창설이었고, 10대 말 20대 초반의 토니 알바, 스테이시 페렐타 등 Z보이스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한다. 대회 1년 뒤 제파 스케이트보드 팀은 해체된다.

하지만 제이 애덤스는 도그타운에 남았다. 2001년 LA타임스와의 서면 인터뷰(당시 그는 수감 중이었다)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보드를 타야 하고…, 그런 간섭이 바보 같아 보였다. 잡지 인터뷰며 광고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물러나 있기로 했던 거다. 늘 그랬듯이 나는 보드를 그냥 즐기며 타고 싶었다.” 스케이트보딩 월드컵의 공동 창설자인 대니얼 보스틱은 한 인터뷰에서 “제이의 멋진 점 가운데 하나는 그가 상업적 관계에 단 한 번도 흔들리거나 연루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라며 “그 점에서 그는 정말 지독했다(pretty hard-core)”고 말했다.

대회에 출전해서도 그는 경쟁보다 그 공간을, 시간을 즐겼다. 스킵 앵블럼은 그런 그를 2002년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기자에게 ‘스케이트보드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했고, Z 보이스 멤버 사를로는 ‘제임스 딘’에 비유했다. 그는 평가에도 대결에도 무심한 듯 보였고, 시합에서든 연습에서든 한 무대에서 같은 동작과 기술을 반복하는 법이 없었다. 복서로 치자면 그는 상대의 약한 부분을 집중 가격하는 영리한 복서가 아니라 모든 부위를 다양하게 공략해 총체적으로 허물어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기이하고 광적인 복서였다. 사진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글렌 프리드만이 ‘XGames.com’에 소개한 제이의 에세이 ‘My Rules’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늘 스케이트가 좋아서 스케이트를 탄다. 그건 별게 아니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어떻게 될지 다칠지 말지는 이후의 일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 가끔 스타일을 생각할 때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그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다. 언제나 즐거움이 관건이다.” 옥중 촬영한 페렐타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스케이트보딩이 직업이 되면서 너무 심각해졌다.(….) 그러면서 재미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제이와 함께 70년대 스케이트보드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토니 알바는 “아이들이 크래커와 우유를 먹고 자랄 때, 제이는 서핑과 스케이트보딩으로 자랐다”고 말했다. 제이는 타고난 보더였다.

1976년 Z보이스가 해체될 즈음의 제이 애덤스. 그는 동료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도그타운에 남아 저렇게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글랜 프리드먼
1976년 Z보이스가 해체될 즈음의 제이 애덤스. 그는 동료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도그타운에 남아 저렇게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글랜 프리드먼

어쩌면 제이의 불행한 삶이 그의 신화를 강화했을지 모른다. 토니 알바가 스타의 삶을 살다가 유명한 보드 메이커로 일찌감치 성공하고, 페렐타가 영화제작자 겸 토니 호크(Tony hawk)같은 2세대 스케이트 챔프겸 영화배우를 길러내는 매니저가 되는 사이, 또 Z보이스의 모든 멤버들이 적당히 행복하고 적당히 평온한 삶을 영위한 80년대 이후의 20여 년 동안 제이는 술과 마약, 살인으로 이어진 주먹질 등으로 감옥을 전전했다. 82년 그는 할리우드에서 한 게이 커플과 싸움을 벌였고, 그게 패싸움으로 번져 한 남자를 숨지게 한다. 그는 6개월 형을 선고 받았고, 2001년에는 마약 범죄로 2년6개월 형을 살았다. 출옥 직후인 2005년, 마약을 끊고 갓 결혼한 두 번째 아내 트레이시(2011년 4월 결혼)와 새 출발을 꿈꾸던 그는 과거의 헤로인 중개 혐의가 들통나 다시 감옥에 간다. 2002년의 영화로 그와 Z보이스가 세상의 주목을 받을 때에도 그는 하와이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보드가 멈춘 적은 없었던 듯하다. 앤젤파이어’라는 매체와의 2002년 서면 인터뷰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스케이트를 탔냐는 질문에 그는 “여기 갇히기 며칠 전이었다. 여기서 몇 년 있어야겠지만 나는 스케이트보드를 포기한 적 없고,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LA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지금도 스케이트보딩을 사랑하고, 그 마음은 7살 무렵의 그 시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100% SKATEBOARDER 4 LIFE.” ‘100% 스케이트보더의 삶’이란 저 마지막 구절을 그는 자신의 뒷목에 문신으로 새겼다.

출옥 후 한 실내스케이트장 관리인으로 취직한 그는 새벽 5시면 일어나 버스로 90분 거리의 직장에 출근, 오전 8시부터 일한 뒤 퇴근 후 잠 9시면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갔다고 뉴욕타임즈는 소개했다.(2008.7.30) 만년의 그는 헐리(Hurley) 등 몇몇 스포츠용품 회사의 후원을 받았고, Z-FLEX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드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휴가를 얻어 아내와 함께 친구들과 멕시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해안에서 서핑을 즐기던 그는 이날 새벽 심장마비로 숨졌다. 수많은 팬들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한 네티즌은 “아버지가 내게 첫 보드를 사주게 해준 사람”이라며 그를 기렸다.

페렐타는 앤젤파이어 기고문에서 “제이가 역사상 최고의 스케이트보더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그는 모던 스케이트보딩의 기원이다.(…) 그는 기원의 씨앗(original seed)이었고, 우리 모두를 감염시킨 바이러스였다”고 말했다. 숨지기 몇 달 전 애덤스는 알바와 페렐타 등 원년 맴버들과 베니스비치 인근의 한 식당에서 모여 Z 보이스 재결성을 논의하기도 했다.(NYT, 2014.8.17)

페렐타의 다큐멘터리와 2005년의 극영화(도그타운의 제왕들) 이전에 Z보이스의 신화를 미국 전역으로 전파한 가장 큰 공로자는 도그타운 출신의 포토저널리스트 크레이그 스테싯이었다. 그는 75년 복간된 잡지 ‘스케이트보더’에 Z보이스의 멋진 연습 사진과 빼어난 글로 도그타운의 그들을 세상에 알렸다. Z보이스 멤버들의 친구로, 스테싯과 함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글랜 프리드먼도 있다. 그는 제이를 추모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누구라도 제이를 안다면, 크레이그 스테싯과 나의 글과 사진에 담긴 도그타운의 모든 이야기가 바로 제이의 이야기임을 알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모든 노력은 사실 제이 애덤스의 정수를 포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전처와 딸 베니스를, 전 여자친구와 아들 세븐을 낳았고, 아내 트레이시와 캘리포니아 산 클레멘테에서 살았다. 그는 2012년, 아주 늦게서야 미국 스케이트보드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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