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30, 40대 직장인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문화생활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다들 쓴 웃음을 지었다. 간신히 그들에게 허용된 자유시간은 늦은 주말 밤이 고작이었으며 그때는 거실 텔레비전 앞에 널브러져 있다고들 했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 뭐 있나요. 치맥이나 시켜 먹으면서 케이블 채널 돌리는 게 낙이라니까요.” 모두들 맞장구쳤다. “맞아요, 치맥!”
주지하다시피 치맥은 치킨과 맥주를 결합한 신조어이다. 어쩌면 지금, 대한민국은 치맥이라는 단어 앞에서만 대동단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채 완전히 분노할 새도 없이 또 분노할 일이 터지고 상대적 박탈감이 나날이 쌓여가는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치킨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만큼 위로를 받는 때는 없는 것 같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나만의 치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21세기 초 한국인의 식문화, 혹은 생활풍속에 대해 이야기할 때 치킨은 아주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전화 한 통화로 치킨을 시켜 먹는 것은 무척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집단기억을 쌓아가는 체험 행위이다.
비교적 싼 가격의 동물성단백질 공급원인 닭이 우리 역사에서 원래 흔한 식재료였던 것은 아니다. 주영하 교수의 저서 식탁 위의 한국사를 보면 조선시대 문헌에는 닭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이 자주 나오지 않는단다. 100년 손님 사위를 위해 씨암탉을 잡는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닭이 귀한 고기였던 까닭이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농촌 가정에 부업으로 양계를 적극 권장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삼계탕이나 백숙, 닭볶음탕 등이 전부인 줄 알던 한국인의 닭 요리법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때는 대략 1970년대 후반부터일 것이다. 점점 빠르게 닭은 치킨이, 닭튀김은 ‘후라이드치킨’이 되어 갔다. 198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은 흔히 아버지가 월급날 퇴근길에 사 들고 오시던 노란 봉투에 담긴 통닭을 아련한 추억의 맛으로 떠올리곤 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어쩌면 집단적인 기억의 왜곡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젊은 사회학 연구자인 정은정의 역저 대한민국 치킨전을 정독하고 나서다. 대한민국 치킨전은 한국인과 치킨의 밀월 관계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최초의 저작이며, 치킨이라는 음식과 치맥 문화로 오늘날 한국인의 삶을 통찰하는 뛰어난 미시사이자 생활사이다. 저자에 따르면 1977년 당시 제조업 노동자의 일일 임금은 3,400원 수준이었고 당시의 고급 치킨인 림스치킨 한 마리는 2,500~3,000원이었다. 즉 아버지가 월급날 사가지고 오시던 통닭은 필연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기억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렇듯 한국인과 한국사회와 치킨은 기묘한 삼각관계를 맺고 있다. 치킨이 한국인의 외식 선호도 1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때가 외환위기가 덮친 1997년이라는 사실도 공교롭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치킨점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때는 2002년 월드컵 전후였다. 1만여개이던 치킨점이 갑자기 2만5,000개로 급증했다. 지금은 3만5,000개 이상이라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치킨집이 새로 개업하고 주인이 바뀌고 또 문을 닫는 풍경은 도시생활자들에겐 이미 너무도 흔한 풍경이다.
극심한 무한 경쟁과 프랜차이즈의 ‘갑’질에 한숨만 늘어가는 치킨집 사장님, 오토바이 사고 위험에 항상 노출되면서도 빠르게 배달을 완료해야 하는 저시급 아르바이트생, 조류독감에 키우던 닭은 땅에 묻고 울어야 하는 양계 농민들, 독과점이 공고한 육계시장, 옥수수사료로 키운 닭을 옥수수가루를 발라 옥수수기름에 튀겨 먹는 조리법, 각 치킨브랜드의 튀김옷이나 소스에 대해서는 목소리 높이지만 정작 주재료인 ‘닭’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는 소비자까지. 어쩌면 지금 ‘치킨’은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들을 집약시켜 놓은 상징적 이름이다. 물론 나 역시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마주하는 치킨과 맥주 한 모금의 조합은 꿀처럼 달다. 가히 소울푸드라 부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치맥 권하는 사회, 치맥으로만 위안 받는 사람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곰곰이 고민해볼 일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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