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의 거장 왕자웨이(왕가위)는 음악 애호가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이 굉장히 독창적인 것으로 유명한 그가 남긴 예외적 작품이 있으니 바로 데뷔작 ‘열혈남아’(1988)다.
‘몽콕 카르멘’이라는 뜻의 ‘왕각잡문’ 또는 ‘몽콕하문’이 원래 제목인 이 영화는 왕자웨이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장르의 공식에 가장 충실하고 대중적인 작품이다. 미완의 연출자였던 그는 첫 영화에서 자신의 영원한 주제인 ‘애틋한 사랑’을 갱스터 장르의 외피에 녹여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 영화는 숙모의 부탁으로 우연히 함께 지낸 장만위(장만옥)와 사랑에 빠진 뒤 주먹 세계를 떠나고자 하는 류더화(유덕화)가 의형제처럼 지내는 고향 후배 장쉐여우(장학우)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는 내용을 담는다. 설정은 다소 진부하지만 류더화가 내뿜는 고독과 허무, 장만위의 눈물 한 줄기가 대변하는 가슴 시린 사랑 그리고 이후 왕자웨이의 전매특허가 된 스텝프린팅 기법과 감각적인 편집 방식이 왕자웨이의 영화의 전성시대를 예고한다.
‘열혈남아’에는 유명한 키스 신이 등장한다.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열혈남아’는 로맨스 영화의 고전으로 남을 가치가 있다. 류더화가 연인이었던 여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술집에서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뮤직비디오적 시퀀스는 그야말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무작정 장만위를 기다리는 류더화의 무모한 고독, 두 사람의 어색한 대화, 주룽반도로 돌아가는 배에 올라 장만위를 포기하려는 듯 유리컵을 던지는 류더화의 절망, 그에게 닿기 위해 버스를 잡으려는 장만위의 가녀리고 단호한 질주 그리고 이어지는 공중전화 부스 안의 키스 신….
왕자웨이는 그러나 이 장면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의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실망을 표하는 선곡 문제다. 류더화와 장만위의 로맨스 장면을 예고하기 위해 주크박스에선 홍콩 여가수 린이롄(임억련)이 ‘격정’이란 제목으로 번안해 부른, 영화 ‘탑 건’(1986)의 주제가 ‘테이크 마이 브레스 어웨이’가 흘러나온다. “방방방방방~” 하는 전자음이 되풀이되는 바로 그 음악, 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를 작곡한 조르지오 모로더가 쓰고 미국 팝 밴드 벌린이 유일하게 남긴 히트곡인 그 노래가.
불운하게도 왕자웨이의 선곡이 들어간 홍콩판으로 이 영화를 처음 보고 그 음악에 실소를 터트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파일럿 톰 크루즈가 도로 위에서 교관인 켈리 맥길리스와 말다툼을 하다 키스를 나눈 뒤 곧바로 잠자리로 골인할 때 나오던 바로 그 끈적한 사랑의 테마가 대체 왜 이 장면에!(왕자웨이는 자신의 세 번째 영화 ‘중경삼림’에서도 왕페이가 크랜베리스의 ‘드림스’를 중국어로 바꿔 부른 ‘몽중인’을 쓴 적이 있다.)
1989년 국내 개봉한 ‘열혈남아’는 대만판이었다. 당시 영화를 본 관객은 린이롄의 ‘격정’ 대신 대만의 국민가수 왕걸과 여가수 엽환이 함께 부른 ‘니시아흉구영원적통(너는 내 가슴의 영원한 고통)’을 잊지 못한다. ‘격정’보다 훨씬 좋은 곡이고 영화에도 훨씬 잘 어울리는 노래다. 대만판을 봤던 관객이 결말도 다르고 노래도 다른 홍콩판을 보고 당혹해 하는 이유다. 대만판은 엔딩 크레딧 때 나오는 곡도 홍콩판의 류더화 노래보다 훨씬 훌륭한 왕걸의 ‘망료니망료아’다.
수많은 팬들의 질타를 이해하지만 ‘격정’을 좋아한다. 필름과 디지털, DVD 3가지 매체를 접하는 내내 홍콩판만 봐서일까. 첫 인상이 너무 강해서인지 여러 차례 보는 동안 조금은 유치한 이 노래에 정이 들고 말았다. 결말도 홍콩판이 더 좋다. ‘격정’을 들을 때면 아련하게 1980년대의 정서가 떠오른다. 할리우드의 상업주의와 팝 음악이 가장 부유하게 사랑을 나누던 때, 홍콩영화의 낭만주의가 청소년의 혼을 쏙 빼놓던 때. ‘격정’은 1980년대 할리우드영화와 홍콩영화를 동시에 환기시키는 독특한 사운드트랙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린이롄의 '격정'이 쓰인 홍콩판 ‘열혈남아’의 키스 장면
대만판 ‘열혈남아’에 쓰인 왕걸의 ‘망료니망료아’
왕걸과 엽환이 부른 ‘니시아흉구영원적통’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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