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황금물결 봄엔 청보리 물결
故박경리 선생, 딸과 함께 왔다 그림같은 풍광에 소설 무대로 낙점
박경리 토지길ㆍ茶박물관 등 명소 즐비
거대한 지리산 산덩이가 섬진강과 만나는, 산자락이 흘러내리는 한 곳에 갑자기 가슴이 확 터지는 편안한 들판이 있다. 대하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너른 들판, 악양들이다. 들판은 넓기도 하거니와 지리산 골짜기까지 깊숙이 뻗어 있다. 고소산성 인근 작은 사찰인 한산사 앞에 서면 260만㎡(80만평)의 너른 악양들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지 정리가 잘 된 들판은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모습으로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황금색으로 물든 들판은 장관을 이루며 어머니 품속 같은 여유로움으로 찾는 이를 품어주고 있다.
고(故) 박경리 선생이 ‘토지’의 배경으로 이곳 평사리를 낙점한 것 역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토지’를 구상한 후 마땅한 무대를 물색했다고 한다. 통영에서 태어나 자라고 진주에서 수학했던 선생은 자신의 언어 때문에 경상도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말투, 즉 언어와 풍습 등 태도에 대한 자연스러움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그러나 만석꾼이 나옴직한 너른 들은 대게 전라도에 있었고, 경상도에선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선생은 외동딸의 탱화자료 수집 여행에 따라 나서게 된다. 선생 모녀는 하동 악양들을 내려다보는 한산사 대웅전의 탱화를 보러 갔다가 바로 지금의 이 풍경을 맞닥뜨리며 무릎을 쳤다. 이곳 평사리가 넓은 들을 지니고 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소설의 든든한 배경이 될 것이란 걸 직감한 것이다.
그렇게 소설 ‘토지’는 평사리를 토대로 구체화됐고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16권으로 완성됐다. 원고지 4만장에 600만 글자가 새겨진 글이다. 최치수 최서희 길상이 용이 두만네 월선이 석이네 등 등장 인물만 600여명이다. 박경리 선생이 “모든 생명을 거둬들이는 모신과도 같은 지리산의 포용력” 때문에 이곳 평사리를 무대로 삼은 소설 ‘토지’는 우리 문학의 중대한 방점을 찍게 됐다.
소설을 통해 거듭난 평사리와 악양들이 이제 느림의 미학을 전파하는 힐링의 땅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점리 아미산 아래에서 동정호까지 펼쳐진 악양들은 봄에는 청보리가 빚어내는 초록융단을 깐 듯한 들판을,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이삭들로 가득 찬 황금들판을 연출하고 있다.
악양들 한복판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다. 마치 넓은 들판의 허허로움을 채워주고 있는 이 나무는 소설 ‘토지’의 두 주인공 서희와 길상 혹은 용이와 월선네 처럼 다정하게 서 있어 ‘부부송’으로 불린다.
들판의 한쪽에는 중국 악양의 동정호와 흡사하다 해 이름 붙여진 동정호가 아름다운 호수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동정호는 한솥밥으로 1,000명이 너끈히 먹을 수 있는 큰 솥이 있어 물이 고인다고 전해 오고 있다.
악양들과 섬진강 물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배기에는 초가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언덕 중턱에는 고랫등 같은 기와집이 덩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소설‘토지’의 장엄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의 건물을 새로 지은 곳이다.
하동군은 2001년 소설 ‘토지’속의 최참판댁을 고스란히 재현한 14동의 한옥을 지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총 9,529㎡부지에 들어선 최참판댁은 조선후기 반가(班家)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별당과 안채, 사랑채, 문간채, 중문채, 행랑채, 사당 등이 일자형으로 이뤄져 있다.
초입에는 TV드라마 ‘토지’의 촬영 세트장으로 활용된 토지마을의 초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천상 옛 시골 여염집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20여 편의 TV드라마와 10여 편의 영화 촬영장으로 활용됐으며 개관 이후 10년간 3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은 하동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지난 7월 부임한 윤상기(60) 하동군수는 “최참판댁을 연간 100만명 이상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박 선생 유물전시와 한옥을 새로 지어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지역 예술인들이 참가하는‘한국의 몽마르트르’로 조성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최참판댁 옆에는 ‘토지’주무대인 평사리에서 이름을 딴 평사리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뒤편에는 문인 집필실이 마련돼 현재 문인 10여명이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평사리문학관은 매년 방학 때마다 전국의 청소년을 비롯해 각 대학, 전국 시ㆍ도교육청 등의 주관으로 문학행사가 줄을 잇고 있어 예비 문학도들의 문학캠프지로 각광받고 있다.
느림의 미학이 살아 꿈틀대는 악양면은 2009년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이탈리아 슬로시티 국제조정이사회에서 슬로시티로 인정 받았다. 실제 악양벌 너른 들판에는 비닐하우스가 일절 없다.
‘사색과 느림의 땅’ 악양에는 이 외에도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명소들이 즐비하다. 섬진강을 따라 걷는 ‘박경리 토지길’은 평사리를 지나는 1코스 18㎞와 19번 국도를 따라 꽃길을 걷는 2코스(13㎞)로 나눠 조성됐다. 박경리 토지길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로 지정되는 등 명품 걷기 탐방로로 자리 잡고 있다.
2만㎡의 넓은 차밭에 자리한 매암차박물관과 섬진강변의 평사리 공원, 대봉감으로 유명한 대축마을 등도 이야기가 숨어 있는 명소들이다.
최참판댁 인근에는 고소산성(사적 제151호)이 있다. 신라시대 돌로 쌓은 산성으로 능선을 따라 5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산성에서 능선길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1,115m의 형제봉을 만난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와 흡사하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군락을 이뤄 봉우리 전체를 붉게 물들여 장관을 연출한다.
유난히 돌이 많은 악양면 일대는 집 안팎의 돌담뿐만 아니라 다랑논도 돌을 쌓아 만들었다. 삼신마을에는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조씨 고가와 돌담길을 만날 수 있다. 160년 전 소나무를 써서 지었다는 이 집은 ‘조부잣집’으로 불리며 소설 속 최참판댁을 떠올리게 한다.
하동=이동렬기자d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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