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1985년 미발행 글 모아 시ㆍ산문ㆍ대담집 3편 동시에 출간
“말이 바람 불어오는 행간에서 / 이제 막 그는 눈을 감았다 / 어두운 자궁 속 태아처럼 / 몸을 웅크리고 / 바람이 가는 방향으로 날아가다가 / 바람 멎는 곳에 / 정액을 쏟을 것이다.”
-이성복 ‘시인’ 일부
이성복 시인의 출간기념회가 경기 파주출판도시 열화당 사옥에서 열렸다.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쓴 시 중 미간행 150편을 묶은 ‘어둠 속의 시’, 산문 일기 편지 소설 희곡 등 40년간 쓴 잡문을 모은 ‘고백의 형식들’, 그리고 30년간 시인이 했던 인터뷰 중 12편을 골라낸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 등 총 3권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다. 책들의 내용으로 볼 때 행사는 시인의 40년 ‘시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사옥 1층에는 이기웅 열화당 대표를 비롯한 출판사 직원들과 시인의 절친인 소설가 이인성, 문학평론가 정과리, 이문재 시인, 김민정 시인 그리고 시인의 고교 동창과 자제들까지 자리했다. 행사 중간 갑작스레 영화감독 김기덕 씨가 들어와 잠시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제 시에 있어 중요한 시기는 1978년부터 1980년, 여기서 더 좁히라면 1979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는 느낌입니다.”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낸 후 지난해 ‘래여애반다라’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심상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미간행 시들은 시인의 문학적 황금기를 전후로 쓰여진 시 중 시집에서 누락된 것들이다. “첫 시집에서는 제 스승 김현 선생이 제시한 방향과 맞지 않는 것은 전부 뺐습니다. 성적인 표현이 들어가거나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 연애시 같은 것들입니다. 두 번째 시집 ‘남해금산’도 전반적인 분위기가 서정적으로 흐르는 바람에 죽음과 격렬한 고통을 노래한 시는 제외됐습니다.” 시인은 이 시들을 두고 “내 시의 지하실”이라고 불렀다.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시인 이성복의 이면이다.
지하에 잠자고 있던 시들이 세상 빛을 보게 된 데는 김민정 시인의 덕이 크다. 2010년 대담을 위해 대구의 자택을 찾은 김민정 시인은 첫 시집의 초고 교정지를 비롯해 쌀집 영수증 뒤에 쓴 잡문까지 고스란히 보관된 것을 보고 책으로 묶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중 시를 제외한 다른 글들은 산문집에 실렸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내복까지 벗어 부친” 글들로, 일상의 소소한 감상을 기록한 글부터 시와 문학에 대한 비장한 각서, 문학상을 수상한 후의 소감, 세계화의 패악에 따른 인문학의 곤경에 대한 개인적 견해까지 다양한 글들이 수록됐다.
특히 ‘시에 대한 각서’의 서슬 퍼런 논조는 한번이라도 시를 써보겠다고 덤빈 이들이라면 모골이 송연해질만하다. “피상적인 시는 시에 대한 부정이며 모독이다.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우리 삶을 칭칭 감고 있는 피상성의 굴레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데 있다. 근본적으로 벗어남이 불가능할지라도, 거듭해서 벗어남을 시도하는 것은 그 외에 다른 진실과 아름다움, 올바름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과 아름다움, 올바름은 오직 ‘불가능’으로만 존재한다.”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기록이 될만한 책 세 권이 문학 전문 출판사가 아닌 열화당에서 출간된 이유는 “조용하게 냈으면” 했던 시인의 바람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 제자들과 함께 치른 소박한 회고 잔치에 흐뭇해하던 시인은 후배 문인들을 향해 오래 진 짐을 넘겨주듯 말했다. “시든, 소설이든, 산문이든 결국 모든 글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글의 사명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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