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편 부모 5단계 거쳐 심판에 청탁… 경찰 "서울시協, 공금유용 등 복마전"
“태권도 선수인 아들의 꿈이 편파판정으로 좌절됐다.”
지난해 5월 28일 인천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던 전모(당시 47세) 관장은 이런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2주 전 고교생 아들은 전국체전 태권도 핀급 서울시 대표 3차 선발전 결승에서 경기 종료 50초를 남기고 5대 1로 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심 최모(47)씨는 이 때부터 유독 아들에게만 경고를 남발했다. 전군은 1분도 안 돼 경고를 7회나 받았고, 앞서 1라운드에서 받은 경고(1회)를 합쳐 결국 반칙패했다. 전씨는 유서에서 “사이가 좋지 않던 심판 최씨가 부당한 판정을 일삼았다”며 승부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전씨의 의심은 1년 4개월 뒤 사실로 확인됐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15일 전군 사건과 관련해 “상대 선수 학부모의 청탁을 받은 서울시태권도협회 관계자들의 광범위한 승부조작이 있었다”고 밝혔다. 조사결과 상대 선수 아버지 최모(48)씨는 시합 전인 지난해 5월 초 고3 아들을 태권도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후배인 서울 D중 태권도 감독 송모(45)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청탁은 다시 서울시태권도협회 김모(45) 전무에게 전달됐고, 김 전무의 승부조작 지시는 협회 기술심의위원회 의장 김모(62)씨, 심판위원장 남모(53)씨, 심판부위원장 차모(49)씨 등 무려 5단계를 거쳐 주심 최씨에게 하달됐다.
이 같은 짬짜미가 가능했던 것은 학부모와 심판, 협회 간부 등이 모두 학연으로 얽혀 선배나 윗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태권도계 내부에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현재 충북의 한 대학 태권도경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학부모 최씨는 후배 송씨와는 서울 D고, K대 동문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승부조작 지시를 받아도 청탁자 외에 윗선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불법이 자행됐다”며 “편파판정 대가로 금품이 오가지 않은 점으로 미뤄 폐쇄적인 학연 문화가 승부조작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협회 운영이 몇몇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도 불법ㆍ탈법을 부추겼다. 임모(61) 전 서울시태권도협회장은 2009년 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활동 내역서를 조작해 협회비 11억원을 임원들에게 부당 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전을 무기로 협회 간부들을 장악하다 보니 감시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될 리 없었다. 서울시태권도협회는 학부모 전씨가 자살한 직후 자체 진상조사를 하고도 해당 심판의 자격을 박탈했을 뿐, 승부조작에 가담한 협회 임원에 대해서는 보직을 사퇴하는 선에서 급하게 사건을 매듭지었다.
경찰은 이날 승부조작을 주도한 협회 전무 김씨에 대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심판 최씨 등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또 공금을 유용한 임 전 협회장 등 11명은 업무상배임 등 혐의로 입건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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