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단이 1300명은 됐을 겁니다. 근래 고교야구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응원단이었죠" 전화기 너머 들리는 경주고 권기홍 야구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떠있었다. 경주고는 경북 포항에서 진행 중인 제42회 봉황대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14명의 선수만으로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1일 천안북일고와의 8강전서 패하며 '기적의 행군'은 아쉽게 멈춰 섰지만,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 2008년 해체 아픔 씻은 ‘기적의 행군’
지난 2008년 동문회관 건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체됐던 경주고 야구부는 지난해 12월 단 14명 만의 선수로 재창단했다. 그 중 2명이 부상당해 이번 대회는 12명의 선수만으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투수는 1학년 김표승 한 명뿐이었다.(▶관련기사) 김표승에게 한계가 오면 유격수로 뛰던 박부성이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정경훈 감독은 "선수가 부족하니 자기 포지션에서 못 뛰는 선수들이 많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영락없는 약체의 모습으로 대회에 나섰던 경주고의 봉황대기 첫 상대는 청각장애 선수들로 구성된 충주성심고. 첫 판을 이길 때만 해도 '대진 운이 좋았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경주고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2회전에서 공주고를 어렵지 않게 꺾더니, 16강에서는 '개최지 프리미엄'을 안고 뛴 강호 포철고에 8-7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8강 상대로 맞은 '고교 최강' 북일고와의 경기에서도 '쉽게 무너질 것'이라는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승부를 10회 연장까지 끌고 가는 근성을 보였다.
● 모교출신 감독·동문·지자체 손 모아 팀 살렸다
북일고에 7-8로 패하며 대회를 마쳤지만, 정 감독은 "아쉬움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묻어있었다. 자신감의 비결을 묻자 "동문들의 힘"이라고 말했다.
준비 기간도 짧고, 선수 구성도 힘들었지만 그는 '선수가 없어서 못 하겠다'는 핑계를 애초에 입에서 꺼내질 않았다. 선배님이자 감독님인 그의 아래 뭉친 14명의 선수는 '경험 부족'이라는 약점을 피땀 어린 훈련으로 메웠다. 밤 11시까지 훈련하며 힘을 기른 선수들은 이번 대회에서 1, 2학년 선수만으로 구성된 팀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수비력을 선보였다.
정 감독은 삼성, 한화 등에서 프로 생활을 한 뒤 올스타전 MVP(1995년)까지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선수 은퇴 후에는 중국 국가대표팀 감독도 맡았다. 그런 그가 경주고 야구부 재창단 선봉에 선 이유는 하나였다. 모교 야구팀의 영광 재현을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섰다.
'동문 감독'이 힘을 보태자 총동문회는 물론 지자체까지 경주고 야구부 부활을 위해 팔을 걷었다. 동문회는 1인 1구좌(구좌당 1만원) 이상, 총 3만 구좌 달성을 목표로 야구부 후원 기금 마련에 나섰고, 경주시 측은 인조잔디 구장 설립 지원을 약속했다. 경주고는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오는 10월 인조잔디 구장 설립을 위한 첫 삽을 뜬다.
● "봉황대기 아니었다면 이런 일 없었다"
재창단 후 첫 봉황대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권 부장은 "봉황대기가 없었다면 이런 영광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봉황대기는 지난 2011년 주말리그가 출범하면서 각 지방대회와 함께 폐지됐다가 고교야구 열기 위축 등 부작용이 심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지난해 부활했다. 모든 팀에게 참가 기회가 주어지는 봉황대기는 경주고 같은 신생팀이나 약체들에겐 강호들과 맞붙을 수 있는 유일한 대회였다.
경주와 멀지 않은 포항에서 대회가 열린 덕에 수 많은 동문들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했고, 8강전에는 전세버스 13대에 나눠 탄 재학생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권 부장은 "8강전에는 동문과 재학생을 합해 1300명 가까이 경기장을 찾았다"며 "근래 고교야구 응원단 중 최대 규모일 것"이라고 말했다. 10여 명의 선수들은 1000명이 넘는 응원단 앞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봉황대기를 통해 경주고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더 큰 목표에 도전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이번 대회 시작 전부터 "2~3년 후를 바라보고 노력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던 정 감독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지만, 내년엔 더 좋은 성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더 기쁘다"라고 말했다.
당장은 적은 인원에 부상 선수까지 생겨 다음 대회 나갈 걱정이 앞서지만, 이번 대회를 경험한 선수들이 성장하고, 유능한 신입생이 온다면 내년에는 더 탄탄한 전력을 꾸릴 수 있다는 게 정 감독의 희망이다. 그렇기에 정 감독은 8강전 패배로 대회를 마쳤지만, 포항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내년에 맞붙게 될 더 강한 팀들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서다.
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