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다는 말밖에 못해?” “노력? 지금 할 노력 아까는 왜 안 했는데?” “얼마만큼 노력할 수 있냐구. 목숨이라도 걸 수 있어?”
직장인이나 군대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아랫사람을 쥐 잡듯 하는 상사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마녀’에도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 부하 직원들의 아첨을 들어가며 어수룩한 신입사원만 괴롭히는 여왕벌 같은 젊은 팀장 한이선(나수윤). 하지만 ‘마녀’는 그가 아니다. 하필 그가 괴롭힌 신입사원 신세영(박주희)이 사악한 마녀다. 이를테면 세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직원에게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여자다. “내가 진짜 누군가에게 마음 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아마 끔찍할 거예요.”
세영은 자해를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인물이다. 깨진 머그컵 조각을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고 연필로 손바닥을 후벼 판다. 자해는 분노 같은 극심한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론 사랑과 관심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애정 결핍의 발로다. “저녁 8시까지 일을 끝내는 데 손가락을 걸 수 있겠냐”는 팀장의 말에 “팀장님의 손가락도 걸 수 있겠냐”며 퇴근 후 집까지 찾아가는 세영의 공포스런 집요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오피스 괴담’을 표방하는 이 영화는 사무실 직원 사이의 공포에서 출발하지만 정작 후반부로 가면 세영이 지닌 마녀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사이코 드라마로 돌변한다. 인물들 사이의 신경증적 갈등 속에서 비정상성이 주는 위협을 그릴 것처럼 하다가 비정상적인 인물의 병리적 해설로 귀결하는 것이다. 이 때 관객은 위험한 마녀가 제거되길 바라야 하는 건지,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마녀를 이해해야 하는 건지 주저하게 된다. 사무실을 벗어난 뒤 마녀에 대한 설명이 장황해지며 공포의 강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은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공포 스릴러와 사이코 드라마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헤매는 ‘마녀’가 뛰어난 공포영화라고 할 순 없지만, 천편일률적인 오류만 반복하는 국내 공포영화들 사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공포영화의 뻔한 클리셰를 재치 있게 활용해 허를 찌르는 장면들에서 유영선 감독은 자신이 공포 장르 마니아임을 드러낸다. 직장 내의 갈등에서 공포의 씨앗을 찾아낸다는 점도 참신하다. 연필깎이, 문구용 칼과 가위, 압정, 날카로운 연필 등 일상적인 사무용품으로 현실의 위협을 그리는 점 역시 눈에 띈다.
감독은 세영의 입을 빌어 “사악한 생각이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만큼 무서운 것”임을 말하려 한 듯하다. 그러나 영화는 마녀를 동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연신 풍긴다. “마녀는 어디서든 사랑 받지 못할 운명인가 봐요. 사악한 건 어떻게든 감춰도 티가 나는 법이니까” “죽어, 사랑 받는 것들은 다 죽어버려” 같은 대사를 연발하는 세영은 혐오스럽거나 공포스럽기보다 외려 측은해 보인다. 11일 개봉했으며 청소년 관람불가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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