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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호 방패막" "사유재산 족쇄" 43년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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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호 방패막" "사유재산 족쇄" 43년 명암

입력
2014.09.1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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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5.4% 면적 지정 돼… 현장조사도 없이 졸속 도입, 독재정권 안보논리에 묻혀

80년대 민주화 이후 규제 완화… DJ정부 2020년까지 해제 결정, 환경단체 보존 활동도 본격화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 잡은 한 마을 도로에 인근 야산이 개발제한구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 잡은 한 마을 도로에 인근 야산이 개발제한구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공청회 한 번 없이 땅 4만평이 하루 아침에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말도 못했습니다. 반대하던 지인들이 경찰서에 불려가는 걸 보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자신의 땅이 빼앗기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대구 수성구에 거주하는 곽연호(51)씨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에 대한 기억을 묻자 어린시절 목도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연임에 성공한 뒤 유신체제를 준비하던 때라,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항의 한 번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살았다는 얘기였다. 이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를 거쳐,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야 그린벨트 해제 논의가 본격화 됐고, 곽씨는 그제서야 할아버지를 대신해 정부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잘 못 꿴 첫 단추(1971~1977년)

지난 1971년 7월 30일. 서울 세종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15㎞ 선을 따라 폭 1~9㎞의 구역이 ‘영구녹지대’로 지정됐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건축물 신축은 물론 확장이나 용도 변경조차 못 하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국내 최초 그린벨트였다. 이후 77년까지 8차례 걸쳐 전국 14개 권역에 총 5,397.1㎢가 지정됐고, 이는 전 국토의 5.4%에 달하는 큰 면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약 132만명(20만4,000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충분한 공론화가 없었지만, 그린벨트는 분명 존재이유가 있었다. 1960년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구과밀, 환경파괴 등이 심화되자 더 이상의 확산을 막고 환경을 보호할 정책적 대안이 필요했다. 때문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고심 끝에 도시관리 선진국인 영국의 그린벨트 제도를 본 따 한국형 그린벨트를 시행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럽 일부 선진국을 제외하곤 유례없는 성공 사례로 평가 받는다.

문제는 과정이었다. 도입 결정 후 1년도 안되 시행에 나선 탓에 제대로 된 현장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는데, 당시 건설교통부 담당자들은 책상 위에 지도를 펼친 채 자를 대고 선을 그어 구역을 정하는 그야말로 졸속ㆍ탁상 행정을 펼쳤다. 때문에 한 집에서 안방은 일반 택지, 화장실은 그린벨트 구역으로 나뉘는 촌극이 전국에서 속출했다. 더구나 군대가 주둔하는 국방상 요충지가 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안보 논리에 쉽게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원칙의 훼손(1980~1997년)

굳건히 유지되던 그린벨트는 1980년대 들어서 변화를 맞는다. 특히 87년 이후 민주화 분위기가 확산되며 그린벨트 주민들의 집단 민원이 증가하자 일부 규제들이 풀렸다. 물론 구역 경계선은 놔두고 건물 신증축 제한을 완화하는 수준이었지만, 사람들의 기대감이 커지기에 충분했다. 실제 1990년대 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자 불법건축, 용도변경 등 개발이익을 노린 그린벨트 훼손이 이어졌다. 윤정중 한국토지주택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전두환 정부 이후 도심 외곽에 자리한 농장들이 건물을 수리한 뒤 근린생활시설로 용도를 변경, ‘OO농원’이란 간판을 달고 버젓이 음식점 영업을 하거나 비닐하우스를 공장으로 이용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단속해야 할 정부는 오히려 스스로 원칙을 훼손했다. ‘공익상 필요’ 라는 명목으로 땅 값이 싼 그린벨트 내에 공공기관 이전을 추진했는데, 실제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는 남산청사에서 구룡산 기슭으로 청사를 옮기면서 관련 시행규칙을 개정해 비난을 샀다.

하지만 규제완화 일변도로 흐르지는 않았다. 이 시기 시민사회가 부쩍 성장하면서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등 환경단체의 그린벨트 보존 움직임도 본격화 됐는데, 그로 인해 그린벨트를 둘러싼 논의는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뤘다.

새로운 원칙 확립(1998~2008년)

1998년 들어선 김대중 정부에 의해 무게추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다. 71년 지정 후 단 한 차례의 구역 해제도 없었던 그린벨트 제도에 처음으로 칼을 댄 것. 그가 대선 후보 시절 내건 ‘환경평가를 통해 풀 지역은 풀고 묶을 곳은 묶겠다’는 공약은 당시 그린벨트 거주민들의 표심을 자극해 당락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많다. 최막중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은 “민주화의 상징인 김대중 후보가 그린벨트 해제안을 들고 나오면서 박정희 정권 당시 재산권을 제약받았던 이들의 표심이 움직였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7월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을 내놓고 이듬해부터 전국 7개 중소도시(춘천 청주 전주 진주 여수 통영 제주)의 그린벨트(1,103㎢)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이어 7개 대도시권은 환경평가를 거쳐 보전가치가 낮은 곳을 중심으로 ‘광역도시계획’을 세워 2020년까지 해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그린벨트 대원칙’으로 불리는 당시 개선안은 현재까지 유효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까지 총 1,530㎢(대도시권 427㎢ 포함)의 면적이 해제됐고 현재 잔여면적은 3,867.1㎢ 남짓 된다.

이 무렵 그린벨트는 선거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됐다. 특히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감이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지역 주민들의 해제 요구가 본격화 됐는데, 환경적 가치와 쾌적한 삶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도 컸던 만큼, 해제론과 보존론은 긴장관계를 이어갔다.

‘그린벨트=미개발지’ 여전한 인식(2008~현재)

이명박 정부에서도 그린벨트는 조정작업을 거친다. 특히 공공임대주택을 짓는 보금자리사업을 통해 자연스레 추가 해제 수순을 밟았는데, 이는 도심녹지를 여전히 일종의 미개발지로 봤다는 점에서 그린벨트를 보는 인식이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더욱이 보금자리만을 위한 특별법까지 만들었음에도 부동산경기 침체로 광명ㆍ시흥지구의 경우 사업이 무산되면서 정부 내부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 국토부 관계자는 “정부가 주택공급이란 미명하에 그린벨트를 손 쉽게 풀어버린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현 정부는 보금자리사업 축소 등 출구전략을 마련 중이다. 하지만 지구 일부를 산업단지와 물류단지로 조성하는 대책을 내놓는 수준에 그쳤고, 최근 9ㆍ1 부동산대책을 통해선 그린벨트 내에 야구장 및 캠핑장 조성을 허용하는 등 난개발 우려도 높였다.

조명래 단국대교수는 “그린벨트가 그간 시류와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으며 애초 도입 취지가 많이 퇴색된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젠 사회전반에 걸쳐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만큼 본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운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김명선 인턴기자(고려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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