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 여성 스트레스에 관심 기울이고 더불어 일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손이라도 다치면 일을 좀 덜 할 수 있을까.” 40대 직장 여성 김모씨는 추석을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다. 평일 내내 밀린 집안 일을 하는 것도 버거운데 시댁에 가선 명절 음식 준비까지 도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명절 때마다 한 번씩 해 보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팔이나 다리에 끼우면 진짜 깁스를 한 환자처럼 보이게 꾸며주는 ‘가짜 깁스’와, 입술에 바르면 빈혈 환자 같은 창백한 인상을 만들어주는 ‘명절용 립스틱’ 등이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과중한 ‘명절 노동’에 시달리는 기혼 여성들의 절박함과 상혼이 어울려 빚은 웃지 못할 촌극이다.
본래 이 이색 상품들은 극(劇) 연출용 소품이다. 명절 노동 부담을 덜려는 여성들의 눈에 띄면서 용도가 바뀐 셈이다. 6일 가짜 깁스 판매 업체에 따르면 추석을 앞두고 매출이 평소의 2배 가량으로 증가했다. 업체 관계자는 “특히 기혼 여성이 제품을 많이 찾는다”고 전했다.
명절 노동 기피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전업 주부인 이모(52)씨는 “(이색 상품을) 직접 살 의향은 없지만 명절 시댁 모습을 떠올리면 가짜 깁스 구매가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의 경우 기피 동기는 더 강하다. 명절 때마다 회사의 당직 근무를 자원하거나 일부러 연휴 중 일을 만들어 아예 시댁을 찾지 않는 여성도 드물지 않다. 회사에서 쌓인 피곤을 풀기는커녕 외려 가중해야 하는 휴일은 필요 없다는 게 이들 호소다.
늘어나는 노동량보다 더 심각한 건 상대적 박탈감이다. 30대 직장 여성 최모씨는 "간신히 회삿일을 마치고 시댁에 갔는데 '너만 일하냐'는 핀잔에다, 소파에 누워 TV만 보는 남편, 눈치 없이 이것저것 해 달란 아이까지 가세하면 가짜 깁스, 명절 립스틱을 찾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라고 말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란 추세가 가부장적 분위기와 계속 마찰을 빚을 경우 명절 노동 회피 방식은 더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분업’이 아닌 ‘협업’이다. 차례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만 여성이 느끼는 명절 스트레스에 남성들이 관심을 갖고 가사 노동에 최대한 협력하는 태도가 더 근본적 해결책이란 것이다. 김귀옥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젠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시대”라며 “서로 어울려 일한 뒤 함께 먹고 더불어 즐기거나 쉬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스스로도 바뀔 필요가 있다.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김숙기 원장은 “시댁 식구들한테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드러내거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시부모에게 미리 솔직히 전하는 것도 해볼 만한 시도”라고 조언했다.
강병조 인턴기자(한성대 영문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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