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으니 그분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부끄럽게도 이젠 성함도 잊었다. 다만 그분의 목소리는 어렴풋 기억난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지워졌는데 성문(聲紋)은 잊지 않는데 그게 나만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분은 그리 살갑고 자상한 분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아주 어린 시절이었으니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눈이 참 선한 느낌이었다. 말씀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가끔 웃으시는 모습이 참 좋았다. 그분은 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셨다.
내가 그분을 기억하는 건 나머지공부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입학 전에 이미 한글 다 떼고 영어까지 익혀서 학교에 가지만 그 때만 해도 글 익혀서 입학하는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부모들은 종일 바삐 일해야 했고, 아이들은 그저 노는 것이 주어진 특권이자 삶의 전부라고 여길 때였으니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입학한 지 1년이 지나도 한글 깨치지 못하고 간단한 덧셈 뺄셈조차 못하는 아이들이 숱했다. 지금처럼 보습학원 따위는 없을 때였으니 선생님은 수업이 다 끝나고 읽는 법, 셈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을 따로 남겨 보충 수업을 했다. 그게 ‘나머지공부’였다.
그런데 우리 반은 참 특이했던 게 나머지공부에 걸리지 않아도 일찍 집에 가지 못했다. 선생님은 공을 내주시며 축구를 하라거나 특별한 곤충 등을 정해서 잡아오라고 시키셨다. 어떤 때는 나무 그늘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시기도 했다. 집에 일찍 가고 싶은 생각에 그게 참 싫은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놀 수 있었으니 은근히 그걸 즐겼던 것 같다. 한 시간쯤 한참 놀다가 교실로 돌아가면 비로소 학교에서 나갈 수 있었다. 철없을 때였으니 다시 서로 섞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쫑알쫑알 떠들고 개울에 종이배 띄우고 시합도 하면서 돌아가는 귀갓길은 등교 시간의 두세 배는 족히 잡아먹었다. 그렇게 우리의 하교 시간은 행복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초반의 생활은 훌쩍 지나갔고 그 선생님과 다시 공부한 적 없어서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선생님이 갑자기 떠오른 건 철이 한참 든 뒤였다. 왜 그분은 우리를 일찍 보내지 않고 운동장에, 뒤뜰에, 나무 아래에 묶어두셨을까? 옆집 아이는 일찍 돌아왔는데 우리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부모님들 마음이 어땠을까? 뒤쳐진 아이가 안쓰럽고 아이 공부를 도와주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가 미안했을 부모님들에 대한 배려였음을 그렇게 늦게 깨달은 게 죄송했다. 그뿐인가? 같은 반 친구인데 누구는 일찍 가고 누구는 남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어린 것들 생각에 어떤 상처와 그릇된 우월감과 열등감을 줄 것인지 가늠하신 배려였다. 일찍 되는 놈 있고 늦되는 놈 있는 걸 두루 감안하신 교육철학이고 소싯적 연대감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해주신 그 깊은 사랑을 지금도 고맙게 여긴다.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남 짓밟고 누르고서라도 먼저 나아가려는 무한경쟁의 비교육을 볼 때마다 그 선생님이 고맙고 그립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 그 원인을 밝히고 책임 있는 이들을 찾아내 벌 줘야 그 참사 되풀이 않을 것을 단순히 분노와 원망 탓이라고 여기는 것은 천박한 처사이다. 당연히 먼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당사자들은 외려 고개 돌리고 짐짓 자신들에게 불똥 튈까 봐 전전긍긍하며,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자 올바른 법 만들어달라고, 제발 만나서 말 좀 들어달라고 급기야 자식 잃은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40일 훌쩍 넘겨 단식해도 외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이를 보면 분노를 넘어 절망을, 과연 이게 인간의 도리인가 하는 회의를 느낀다.
그런데 그렇게 겨우 숨 이어가며 단식하는 희생자 가족과, 응원과 연대의 단식에 나선 이들 앞에서 보란 듯이 닭 뜯고 자장면 흡입하며 이죽대는 어른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에게 사람에 대한, 생명에 대한 예의는 있는지 아연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리 신념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건 사람으로 할 짓이 아니다. 선생님이 보셨더라면 매를 드셨을까, 아니며 그이들 나머지공부를 시키셨을까 궁금하다. 사람 도리 배웠어도 너희들은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그러시지는 않으실까?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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