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와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 정원을 연기한 한석규가 내레이션으로 하는 마지막 대사다. 1998년 개봉 이후 수없이 회자돼 이제 그 뉘앙스가 닳아버린 듯한 느낌이 들 만큼 한국 멜로영화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대사다.
가을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 잎사귀처럼 예쁜 대사가 즐비한 이 영화는 정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정원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내레이션이 아닌 대사도 정원이 처음과 끝을 책임진다. 첫 대사는 사진관 손님을 맞이하며 “아유,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고, 마지막 대사는 병원에서 자신을 간병하는 여동생과 나누는 대화다. 문병 올 만한 여자 없느냐는 동생의 질문에 정원은 “됐어, 보고 싶은 사람 없어”라고 힘없이 말하며 유리창 밖을 내다 본다(이 대사 이후 영화는 16분 가까이 대사 없이 흘러가다 저 유명한 마지막 내레이션에 도달한다).
창문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다. 두 주인공 정원과 다림(심은하)이 처음 한 프레임 안에 잡히는 것도 창문에 비친 모습을 통해서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프레임에 있는 것 역시 정원이 커피숍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다림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창문 모티프는 노래로도 등장한다. 정원이 극 초반 옛사랑을 만나고 난 뒤 버스를 타고 가며 창 밖을 바라볼 때 짤막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다.
‘창문 너머…’는 산울림의 김창훈과 김창익 두 멤버의 군 복무로 인해 사실상 김창완의 솔로 앨범과 다름 없었던 산울림 6집(1980년)에 담긴 곡이다. 김창완은 자신의 첫 솔로 프로젝트인 이 앨범을 불과 26세의 나이에 만들었다. 다섯 개의 코드로 이뤄진 단순한 곡인 ‘창문 너머…’에 담긴 회고적 시선은 6집 직후 줄줄이 터진 ‘청춘’ ‘회상’ 같은 히트곡에서 최근의 ‘E메이저를 치면’까지 30년 넘게 이어온 김창완 표 발라드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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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노래가 있다. 정원이 다림을 기다리며 사진관 소파에 앉아 흥얼거리는 김광석의 ‘거리에서’다.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는 한석규가 촬영 현장에서 곧잘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는데 그걸 본 허 감독이 예정에 없던 설정을 제안해서 완성된 장면이다. 김광석은 이 영화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진호 감독은 김광석이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죽어가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제목과 달리 8월도 12월도 아닌 9월이나 10월에 더 어울리는 영화다. 실제로 촬영도 1997년 9월 20일 시작해 대부분 가을에 했고 극중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지는 것도 가을이다. 이 영화는 영화 안팎으로 탄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양면을 아우른다. 한참 뜨거운 8월을 보내고 있는 나이에 12월을 준비해야 하는 정원의 마지막 사랑과 이제 겨우 초여름에 접어든 다림의 첫사랑. 유영길 촬영감독은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40년의 영화 인생을 마쳤다.
인공적인 빛과 색, 강압적인 클로즈업, 영혼 없는 장면 분할로 가득한 요즘 영화들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유영길 촬영감독은 영화 속 정원처럼 마지막 혼을 다 바쳐 완성했다. 그에겐 카메라의 렌즈가 영화라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다. 그 창 너머 우리는 어렴풋이 옛 영화의 절경을 바라본다.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찬사와 감상에 굳이 첨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두 감독의 대화처럼 들렸다. ‘허 감독, 이 장면에는 이 쪽 앵글의 빛이 어떨까’ ‘유 감독님, 죄송한데 두 배우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렸다 찍겠습니다’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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