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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햇살이 빚은 신의 물방울 '고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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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햇살이 빚은 신의 물방울 '고슈'

입력
2014.09.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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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와인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 수입되는 상품은 1종뿐, 매화가 필 적에 잠시 나왔다 사라지는 사쿠라 와인이 전부다. 매년 11월에 출시되는 햇포도 와인 보졸레 누보와 비슷한 것 같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접대용으로 국내 일본인이 구입하는 정도랄까. 와인애호가들 중에 일본에 자주 들르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유럽 와인을 비교적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이지 일본 와인의 매력에 이끌린 것은 아니다.

야마나시산 포도는 당도가 높아 와인 만들기에 적합하다. 고유 품종인 고슈를 비롯해 샤르도네 같은 화이트와인, 서양품종을 블렌딩한 다양한 레드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야마나시현 제공
야마나시산 포도는 당도가 높아 와인 만들기에 적합하다. 고유 품종인 고슈를 비롯해 샤르도네 같은 화이트와인, 서양품종을 블렌딩한 다양한 레드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야마나시현 제공

후지산이 내린 ‘신의 물방울' 고슈

일본 와인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된다. 1877년 일본은 프랑스에 두 명의 유학생을 파견해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 기술을 전수받도록 한다. 2년 후 이들은 포도 묘목을 대량으로 구입해 귀국한 뒤 육종연구소를 세워 이를 일본 전역에 배포했는데 이것이 일본 와인 역사의 시작이다.

포도가 일본에 처음 전해진 것은 약 1,300년 전으로, 카스피해 지역의 품종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일본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도 재배 지역은 일반적으로 강수량이 적고 일조량이 많으며 일교차가 큰 기후 조건을 가진다. 포도가 한창 성숙해야 할 시기에 태풍에 시달리는 일본이 와인 산지라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일본의 영산(靈山) 후지산과 미나미알프스 등 산맥에 둘러싸인 야마나시의 분지는 건조한 날씨와 강렬한 햇빛, 큰 일교차를 가진 일본 내 최적의 포도생산지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맞게 진화된 품종이 바로 고슈(甲州)다.

현재 야마나시현의 와인양조장은 80개가 넘고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이 일본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슈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2010년에야 국제와인기구(OIV)에 고슈라는 명칭을 등록하는데 성공했고, 작년부터 EU내에서 야마나시산 레이블을 사용해 제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스타일의 담백한 풍미

고슈는 코르크 대신 스크류 마개를 쓴다. 색깔은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보다 노란빛이 약하고 연한 레몬색을 띤다. 귤 복숭아 레몬 향기가 은은하고 라이트 바디로 맛은 깔끔하지만 상쾌함이 덜하고 신맛이 강하다. 리슬링이나 샤르도네 같은 유럽 품종의 달콤함이나 강렬한 맛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약간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공적으로 맛을 좋게 하고 탄닌을 첨가하는 과정인 오크통 숙성이 과도한 장식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고슈는 가이세키 요리같은 담백한 일본 음식과 잘 어울린다. 스시나 굴 튀김 같은일본음식을 즐기는 한국인이라면 고슈에 이끌릴 만하다. 고슈를 맛보면 누구나 일본문화 전반에서 보이는 담백함은 고슈를 길러낸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포도의 언덕’과 4대 와이너리

카츠누마 지역 와이너리에 수확을 기다리는 포도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야마나시현 제공
카츠누마 지역 와이너리에 수확을 기다리는 포도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야마나시현 제공

야마나시 와인투어를 한다면 현 중심에 있는 카츠누마의 ‘포도의 언덕’을 방문해 보길 권한다. 언덕 주변엔 800ha에 달하는 광활한 포도밭이 장관을 이룬다. 지하 와인창고에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2만병의 와인이 저장돼 있다. 1,100엔(한화 약 1만1,000원)만 내면 누구나 와인을 맛볼 수 있고 시음용 잔은 기념품으로 가질 수 있다.

일본 위스키의 원조이자 세계적인 주류 메이저 산토리가 운영하는 와이너리인 '토미 노 오카(登美の丘)'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만화 ‘신의 물방울’에 소개돼 널리 알려진 ‘토미’레이블 라인업으로 유명하다. 멀리 후지산을 바라보는 언덕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방대한 규모는 일본 와인산업의 위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따가운 햇살과 맑고 메마른 공기를 접하면 이곳이 천혜의 포도 산지라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와인 테이스팅과 식사, 농장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또 세계적으로 희귀한 귀부(貴腐)와인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글자 그대로 귀하게 썩혔다는 의미인 귀부와인은 곰팡이를 번식시켜 부패시킨 것으로 단맛이 매우 강하다. 가격은 시가 5만엔이 넘고 시음 한 잔에만 2,000엔을 받는다.

샤토 메르시안은 1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와인의 원조로 국내 판매1위를 기록하고 있는 곳이다. 깔끔하고 누구나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세련되지만 대중적인 와인이 특징이다.

그레이스 와인은 영국 와인 콩쿠르에서 금상을 차지할 정도로 양질의 와인을 만들며 고가로 유럽에 와인을 수출하며 고슈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

로리안 와인은 시라유리양조가 운영하는 곳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사용된 수제벽돌로 재현된 돔 형태의 셀러도 갖추고 있다. 유일하게 한국에 수출하고 있는 곳으로 3대째 와이너리를 이어가고 있는 사장님은 한때 한국 와인 발전에 도움을 준 인연도 있다.

와인의 생명 떼루아

카츠누마 '포도의 언덕' 지하 와인창고에서 관광객들이 시음하고 있다. 이영준기자
카츠누마 '포도의 언덕' 지하 와인창고에서 관광객들이 시음하고 있다. 이영준기자

일본은 레드와인도 생산한다. 일본 와인포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가와카미 젠베이가 1927년에 개발한 무스카트 베일리A라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서양종과 블렌딩한 여러 와인을 선보이지만 레드와인의 여왕 카베르네 소비뇽의 풍부한 향미와 두터운 바디, 피노누아의 세련된 미각를 즐기는 사람을 끌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람과 포도 그리고 자연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지역의 좋은 와인이 탄생한다는 것이 이른바 떼루아(terroir·토양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원리다. 일본인들은 척박한 토양과 불순한 기후를 이길 자신들만의 품종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고 고슈라는 화이트 와인의 성취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번에 일본 와이너리를 둘러보면서 레드와인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 맛이 비슷해지는‘와인의 세계화’의 우려 속에서 일본인들의 존경할만한 장인정신은 더욱 빛이 난다. 떼루아를 완성시키는 고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준 여정이었다.

야마나시=이영준기자 y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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