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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이익의 농부 등용 주장

입력
2014.09.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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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기업에 다니던 직장인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런 귀농(歸農) 현상이 조선 후기에도 있었다. 조선 후기 노론 일당독재가 계속되면서 여기에 끼지 못하는 사대부들은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정치 참여가 거부된 사대부들은 향리(鄕里)로 낙향해 학문이나 해야 했는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없을 경우가 문제였다. 이 경우 스스로 농사짓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생활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순박해 보였던 농민들이 의외로 텃세가 세다는 이야기는 흔한 일화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학문과 농사를 병행하는 사농(士農) 일치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인데, 안산 첨성촌으로 낙향한 그는 스스로 ‘성호지장(星湖之莊)’이라고 불렀던 ‘성호농장’에서 스스로 논밭을 갈아 삶을 꾸렸다. 성호(星湖)라는 호가 여기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귀농(歸農) 대선배가 성호 이익이다. 그런데 성호보다 먼저 귀농을 실천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보다 세 살 많았던 정상기(鄭尙驥ㆍ1678~1752)라는 사대부였다. 정상기의 본관은 하동(河東)으로서 단종을 버리고 세조를 택한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인데도, 농포자(農圃子ㆍ농사꾼)란 호를 쓰면서 농사를 지었으니 명분 보다 실리를 선택했던 조상과는 사뭇 다른 인생철학을 가진 셈이다. 그가 특출 났던 점은 향거요람(鄕居要覽)이란 책을 썼다는 점이다. 요즘 말로 옮기면 ‘향촌에서 사는 방법’, ‘귀농매뉴얼’ 쯤 될 것이다. 그가 이익에게 책의 서문을 부탁하자 성호는 ‘향거요람 서문(鄕居要覽序)’을 써 주는데, 춘추(春秋)시대(BC 770~BC 221) 제(齊)나라 관중(管仲ㆍ관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 환공(桓公)은 재상 포숙아(鮑叔牙)의 극력 천거로 자신을 죽이려던 관중을 등용할지 여부를 결정하고자 면접을 봤다. 관중과 포숙은 그 유명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성어(成語)를 만든 사이다. 이 면접 때 관중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요체로 인재등용을 꼽는다. 여기까지는 특이할 것이 없지만 농사 경험이 있는 수재를 등용하라는 권유에서 관중의 혜안이 돋보인다.

“농부의 자식은 늘 농부가 되지만, 순박하고 질박해서 간사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뽑은 수재(秀才)를 사(士)로 삼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 많은 수확을 거두고, 출사하면 크게 현명하니 성왕(聖王)께서는 농부를 공경하고 경외하며 가까이 지낸 것입니다.(관자(管子) ‘광군소광(匡君小匡)’)”

국정을 맡을 인재를 머릿속 지식만 가득한 사(士)에서 찾지 말고 농사꾼 중에서 찾자는 말이었다. ‘향거요람 서문’에서 이익은 “일을 할 때는 부지런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 도(道)가 있다”고 일하는 요령도 중시했다. 거기에 “한 뙈기 밭의 곡식을 증대시키면 한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한 사람이 농사짓는 방법을 밝혀주면 한 집안의 삶이 즐거워진다… 이것이 군자가 인(仁)을 베푸는 방법이다”라고 말해서 농사를 선비의 인(仁)의 실천까지 연결시켰다. 당시 사회상황에서 볼 때 이것도 소극적 실천은 아니겠지만 보다 적극적인 실천, 즉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는 적극책을 주장했다. 이익이 ‘밭도랑과 이랑에서 인재를 발탁하자’는 뜻의 ‘천발견무(薦拔?畝)’를 쓴 것은 이런 소신의 발로였다. 이익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먹을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면서 “곡식은 소인(小人ㆍ힘없는 백성)이 생산하니 심고 거두기의 고통은 소인만이 진실로 알 수 있다. 왕공대인(王公大人)은 지식이 넓고 생각이 깊어서 먼 일도 추측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몸이 안일한 데 있어서 보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백성들의 살을 에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다 알 수 있겠는가?(성호사설 ‘인사문’ 천견발무)”라고 일축했다. 조선 후기 벼슬아치들은 마치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노동을 천시하고 속으로는 각종 이권을 챙겼다. 그래서 이익은 “그러므로 공경(公卿)들에게 소인들의 농사를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閥閱)이란 하나의 칼자루를 먼저 깨뜨려버리고 몸소 농사의 고통을 아는 자 가운데 재능과 덕망 있는 자를 가려 등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익은 귀농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세상을 포기하거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사대부들이 천시했던 노동의 철학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큰 문제점이 정부 고위층이나 정치권 상당수가 조선 후기 사대부처럼 노동이나 농사의 어려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는데 있다. 삶의 고통을 모르니 어찌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익의 외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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