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풀려야 경기가 뜬다. 정부가 빚을 권한다. 미끼는 저금리다. 물건값은 거품처럼 계속 부푼다. 기대 탓이다. 빚을 불리는 건 투기욕이다. 하지만 거품은 꺼지고 불황은 돌아온다.
“부동산 실수요자의 눈으로 목격한 최경환 부총리의 경기부양 드라이브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무덤 속처럼 조용하던 동네 부동산들이 장마당처럼 북적거렸다. 아파트를 계약하고 돌아선 후 며칠 지나지 않아 급매물들은 자취를 감춰갔다. 알게 모르게 매매가격은 조금씩 올랐다는 말이 들려왔다.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상품들의 이자는 내려갔고, 은행창구에서 직원들은 “10년 전만 해도 LTV 100%까지 척척 대출을 해주는 게 흔한 일이었다”며 대출 건이 문제없이 진행되리라 말했다. (…) 하지만 부동산 경기가 달아오름에 따라 가계부채 악화에 대한 우려도 자라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성급히 확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통령의 금융권 보신주의 타파 의지까지 맞물리면서 부동산 시장을 향한 돈의 흐름은 점차 거세질 것이고, 이 격류를 견디지 못하는 부실의 지점에서 악성 부채를 짊어진 서민들은 치명적인 좌초를 경험할 수밖에 없어서다. 결과적으로 시류에 편승한 것처럼 이뤄낸 아파트 구매와 담보대출로 나 또한 이 격류 속에 뛰어든 셈이다. (…) 8월 들어 살고 있는 동네의 전셋값이 치솟았다는 뉴스가 들린다. (…) 반전세의 유행 탓에 줄어든 전세물량을 저금리 기조 때문에 더욱 찾기 힘들어지면서 주변에선 내 집 마련을 서두르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이래저래 이들 서민의 선택지는 넉넉하지 못하다. 무리해서라도 빚을 내 집을 살 것인지, 아니면 쪼들리며 셋집을 전전할 것인지.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는 연일 시장으로 자금을 쏟아 붓고 있지만 서민의 설 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좁아지는 느낌이다.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의 두 배에 달하며, 주요 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지난달 4조원 가까이 급증했다. 나를 비롯한 서민들이 단순히 정부의 부동산 활성화 대책의 화려한 면에 혹해서 무리한 선택을 하지 않았기를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
-끝내 아파트를 사고 말았다(한국일보 ‘36.5°’ㆍ양홍주 경제부 차장대우) ☞ 전문 보기
“전후의 여느 위기와 달리, 왜 이렇게 경제는 회복되지 않는 것일까? 경제학자들은 “대차대조표 위기”라는 표현을 쓴다. 쉽게 얘기하면 빚이 너무 많아서 웬만해선 투자나 소비를 늘리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득이 조금 늘어나도 빚을 갚으려 할 테니 돈은 도로 금융기관으로 돌아가고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를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테니 말이다. 지난 30년 동안 금융완화 속에서 “부채주도성장”을 한 결과다. (…) 상황이 이러니만큼 나는 확대정책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최경환 부총리가 인사청문회에서 “가계소득의 증대”에 의해 새로운 방향의 성장을 꾀하겠다고 했을 때, 실제로 “소득주도성장”을 정책기조로 삼는다면 그의 팬이 되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최 부총리는 “부채주도성장”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상층으로 돈을 몰아줘서 이들이 부동산 경기의 불씨를 살리면 중산층이 빚내서라도 이를 뒤따라 올 것이라는 얘기다. (…) “소득주도성장”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래로 돈이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 그리고 사회적 경제가 바로 그런 정책들이다. 하지만 대통령, 부총리, 총리가 돌아가면서 담화를 발표하면서까지 이 정부는 정반대의 길로 국민을 몰아가고 있다. (…) 어쩌겠는가?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수밖에…. 아무리 집값이 들썩거린다 해도 절대로 빚내서 투기 대열에 동참하지 마시라. 현재의 경제 상황에서 그 거품은 앞으로 1~2년 내에 꺼질 수밖에 없다. 그때는 지금도 잔뜩 끼어 있는 거품까지 한꺼번에 걷힐 가능성이 높다.”
-“대공황 그 이상”(9월 1일자 경향신문 ‘정동칼럼’ㆍ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 전문 보기
예술 작품은 어떻게 평가되나. 대중 관객과의 소통은 마지막이다. 먼저 전문가의 심미안을 통과해야 한다. 표현 자유는 공정한 경합 기회일 터. 정치에만 공론장이 필요한 게 아니다.
“광주비엔날레 20주년 잔치에 재를 뿌릴 뻔했던 ‘홍성담 걸개그림 사태’는 작가 홍씨가 문제의 작품 ‘세월오월’ 전시를 자진 철회함으로써 일단 재봉질은 된 듯하다. (…) 홍씨가 ‘세월오월’을 서울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제 돈 들여 전시하거나 자기 집에 걸었으면 별문제 안 됐을 것이다. 지금은 대통령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 이웃집 흉보는 것보다 쉬운 시대다. 홍씨는 대통령 허수아비가 문제 되자 대통령 얼굴을 지우고 닭을 대신 그려넣었다. 그 ‘닭’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런 점에서 ‘세월오월’을 둘러싼 사태의 본질은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다. 홍씨는 이번 사태로 잃은 게 없어 보인다. 그는 그저께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세월호 사건을 “국가가 벌인 대량학살”이라고 했다. 또 “이 같은 폭력이 빚어진 것은 무능한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기록하기 위해 ‘세월오월’을 그렸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동의하든 안 하든, 작품을 통해 홍씨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 작품이 논란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행정 당국의 부당한 간섭으로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예술가로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작가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국민이나 관객에겐 보고 싶지 않은 작품을 안 볼 권리도 있다. 이번처럼 압도적인 공적(公的) 예산 지원을 받아가며 공공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 모든 예술가가 그려내는 게 다 예술일 수는 없다. 작가가 증오와 적의(敵意)를 날것으로 쏟아낸 작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表現의 자유와 국민의 ‘안 볼 권리’(조선일보 ‘김태익의 태평로’ㆍ논설위원) ☞ 전문 보기
“작가 스스로 전시 철회를 선언함으로써 일단 봉합 수순에 접어든 홍성담 걸개그림 ‘세월오월’ 사건은 광주의 속살을 들춰냈다. (…) 만약 광주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부여한 안정적인 기표가 아니라 역사의 유훈을 호명해 현재의 시대정신으로 재생산하는 역동성일 것이다. (…) ‘세월오월’과 함께 유폐된 것은 비단 표현의 자유만이 아니다. 그것은 광주정신의 실종과 함께 예술적 공론장의 파국을 불러왔다. 예술적 소통이 매개하는 공공영역, 즉 예술공론장은 개념이자 제도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표현의 자유다.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예술의 전제이자 존재 이유다. (…) 광주비엔날레가 홍성담 걸개그림을 전시하지 않은 것은 그 장을 온전한 예술공론장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제한을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출품작에 관한 비평적 논의나 대책 없이 행정관료의 잣대에 먼저 노출된 소통 경로와 책임큐레이터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N분의1로 출품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결정 구조는 큐레이터 정신을 병들게 했다. (…)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큐레이터 정신이다. 첨예한 논점으로 사회를 일갈하는 예술가와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는 대중 사이에 선 큐레이터의 판단력은 예술공론장을 지탱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큐레이터는 예술의 개념과 제도를 지탱하는 매개자이자 생산자이며,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갈무리하는 지식인이자 실천가다.”
-예술공론장과 큐레이터정신(8월 29일자 서울신문 ‘시론’ㆍ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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