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잇따른 ‘금융 보신주의’ 지적을 계기로 정부의 은행권에 대한 ‘모험 대출’ 독려가 본격화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정점으로 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금융 보신주의’를 질타한 이후 금융당국이 중기 대출 독려에 나서고 시중은행도 이에 떠밀려 급히 중기 대출을 늘리기 위한 태세를 가다듬고 있다. 국민은행은 아예 기술금융팀을 만들었고, 신한은행은 기업대출 목표액 중 약 90%를 중소기업에 할당했고, 우리은행은 ‘우리 창조기업 파트너론’ 등 관련 상품을 내놓았다.
이러한 금융권의 움직임은 금융 보신주의 탈피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만하다. 문제는 금융권이 기업의 실적향상 가능성과 실질적 원리금 상환 능력 등을 가늠할 독자적 리스크 평가 모델의 개발이라는 절차를 결여한 채 금융당국의 압력에 따른 기계적 대응일 가능성이다. 그 경우의 부작용은 현재의 중기 자금 경색 못지않게 금융권은 물론이고 경제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
우선 금융부실 위험성이다. 현재의 지표로 보아 당장 눈앞의 위험은 아니지만, 최근 금융권의 장기 신용위험에 대한 잇따른 경고도 간과할 수 없다. 지난달 28일 현대자동차산업연구소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부채 비중이 계속 증가해, 앞으로 미국의 금리인상 움직임이 파급될 경우 대출상환 능력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튿날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올 2분기 가계부채가 1,040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로 늘었고 증가율도 전년 동기 대비 6.2%에 달했다는 한국은행의 자료를 인용, 한국 금융산업의 잠재적 위험성이 여전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주택담보대출 비율(LTV) 과 총부채 상환비율(DTI) 완화와 맞물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가 가계대출 수요를 늘리고 있고, 최경환 경제팀의 거듭된 시장활성화 다짐에 힘입어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의 기지개가 감지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끼는 조짐은 결국 장기금융부실과 금융불안의 예고와 다름없다.
이와 함께 정부의 일방적 금융완화 주문과 이에 대한 은행권의 기계적 수용은 과거 금융부실의 주된 요인이었던 정책금융의 폐해를 일깨운다. 기업의 장래성이나 실질 상환능력에 대한 자체 평가기준을 결여한 상태에서 당국의 드라이브에 발을 맞추다 보면 ‘정은(政銀) 유착’은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은행과 국민은행, 농협은행 등 대표적 금융기관의 인사ㆍ경영에 정부 입김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의 기술금융 독려가 일단 먹혀 들기 시작했다면, 더 이상의 무리한 주문은 자제해 마땅하다. 시장자율은 금융도 예외가 아니고, 보신주의 타파도 금융권의 자체 노하우 개발 등을 통해야 참된 성과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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