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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고추도 우리 꺼 아니래요" "씨앗 없으믄 농사는 다 헛것이지"

입력
2014.08.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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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다국적 기업이 IMF때 사 가 종자값 주고 로열티 주고 10년간 외국에 8000억이나...

옛말에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고 했는데 요즘은 거의 모든 종자를 사 오니...

美 불임 면화 종자 수입한 인도는 종자값 20년간 600배 올라서 농민 수십만명이 목숨 끊었다지

병이 찾아 온 고추들.청양고추도 예외는 아니다.이미 주인이 바뀐 청양고추를 두고 충남 청양군과 경북 청송,영양군이 서로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모습은 아이러니 하다.원래는 청송과 영양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 맞다.
병이 찾아 온 고추들.청양고추도 예외는 아니다.이미 주인이 바뀐 청양고추를 두고 충남 청양군과 경북 청송,영양군이 서로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모습은 아이러니 하다.원래는 청송과 영양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 맞다.
종자를 얻기 위해 토종인 앉은돔부콩과 강낭콩을 수확해 말리기를 반복하고(위) 성장한 마늘에서 얻어내는 마늘씨앗을 처마 밑에 걸어둔다.장담하건대 콩 한알 한알,마늘 한쪽 한쪽에 아내와 할머니들의 지문이 수없이 묻어 있을 것이다.
종자를 얻기 위해 토종인 앉은돔부콩과 강낭콩을 수확해 말리기를 반복하고(위) 성장한 마늘에서 얻어내는 마늘씨앗을 처마 밑에 걸어둔다.장담하건대 콩 한알 한알,마늘 한쪽 한쪽에 아내와 할머니들의 지문이 수없이 묻어 있을 것이다.
필자가 밤나무 아래 풀을 예초기로 베고 있다.일찌감치 떨어진 올밤(조생종)은 곧 다가올 추석 제수용으로 쓸만하다. 본격적인 밤 수확은 9월 중순 이후 시작된다.
필자가 밤나무 아래 풀을 예초기로 베고 있다.일찌감치 떨어진 올밤(조생종)은 곧 다가올 추석 제수용으로 쓸만하다. 본격적인 밤 수확은 9월 중순 이후 시작된다.

낯설다. 아침 오토바이로 농장 가는 길, 색이 진하다 못해 무겁고 차갑다. 비가 내린 끝이라 그런가. 폭탄 같은 비가 부산 창원을 통째로 집어 삼키더니 여기 구례에도 허기를 남기고 간 건가. 반소매 틈으로 헤집는 공기도 다르고 바지 자락 끝 양말에 닿는 바람도 날카롭다. 시간과 계절이 무섭다 싶었다. 시원해서 좋아야 하는데 한 쪽 눈이 찡그려졌다. 순간 비에 파헤쳐진 웅덩이에 오토바이가 덜컹하며 혀를 깨물었다. 으~, 쇳물 냄새까지 났다. 왠지 불길하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생각이 불길해서 아무 생각 않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물 꺼내 벌컥거리며 시작하던 지난 주 아침과 달리 따끈한 커피가 댕겼다. 봄에 후배가 사다 준 240개 들이 인스턴트 막대커피가 열 개 남짓 남았다. 대부분 찬물에 타서 먹다 보니 끝 모금은 설탕을 씹어야 했지만 오늘은 잘도 녹는다. 컵 속에서 빙빙 도는 크림자국을 보고 ‘일이 잘 풀리려나’ 생각하며 우아하게 입을 갖다 댔다가 혀를 삶을 뻔 했다. 오늘은 혀가 수난이다. 혀를 쭉 꺼내서 한참을 찬물에 담그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얼얼얼얼'거리며 공냉식 냉각으로 마무리 하는데 장씨 아저씨가 오셨다.

“자네 요 아래 감밭 김씨 아나?” 가끔 지나가다 들러서 돈 자랑하는 그 김씨를 말씀하시나 보다. 이웃에게 싸게 샀던 땅이 고속도로 부지로 수용돼 억대 이익을 봤다고 다섯 번쯤 말한 그 김씨. “예, 알죠.” 커피 한 잔 타서 드리며 대답했다. “거 아주 경우가 없는 사람이여. 가끔 자네랑 이야기 나누더만 너무 친한 척 말어.” 커피를 한 모금 하시려던 아저씨가 조금 전 나처럼 몽땅 뱉어냈다.

“경우가 어떻길래요?” 여쭤봤다. “저 눔이 몸 아픈 즈그 어매 모시기 싫어서 요양원에 데려다 놓고는 생전 가보도 않고...”로 시작해서 마을 일에 협조 안 해 애먹었던 일, 자녀들이 속 썩여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욕 먹던 일, 말은 얼굴처럼 번지르르 해서 아줌마들 깨나 꼬셨던 일까지 길게 이어졌다.

사실은 이 말씀도 세 번 째였지만 처음처럼 들었다. 아저씨가 반복 강조하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 지금도 차가 마주쳤는데 이 눔이 나보고 후진하라고 버티는겨. 지는 조금만 내려가면 비켜설 때가 있고 나는 쩌그 위에꺼정 빠꾸로 올라가야 허는데, 나이도 어린 노무시키가 말여. 경우가 아니잖어. 안 그런가?”

시골에 내려와서 자주 듣는 단어 중 하나가 ‘경우’라는 말이다. 참 좋아하는 말인데 대개 “경우가 밝다” 혹은 “경우에 어긋난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경우가 있다 없다” 혹은 “경우가 아니다”라고 말씀들 하신다. 사전에 나오는 ‘이치’나 ‘도리’와도 어감이 다르다. 법령이나 규약보다도 더 강력한 힘이 있기도 하다. 가령, 마을에서 농사 문제로 다툼이 일었을 때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지만 어르신들이 한 쪽에 대해 “그건 경우가 아니지~” 하시면 그걸로 끝난다. 지역이나 마을의 역사와 습관, 내력 등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지금까지 여기서는 그렇게 살아 오지 않았고, 그런 때는 이렇게 해왔으니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게 맞거늘, 법으로 따져서 우기고 싶으면 우리마을에서 더 이상 지내기 힘들겨’ 뭐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헌데 자네 고추 다 됐나 보이. 봤는가?” 무슨 말씀인가 했는데 밭으로 올라가보니 고추가 초토화 돼 있었다. 불과 이틀 전 한 두 개 나무에서 탄저병 증상이 있는 걸 봤는데 사흘 새에 분무기로 뿌린 것 마냥 병에 걸렸다. “어! 아저씨, 이틀 전만 해도 괜찮았어요. 어떻게 이래요?” “순식간이라고 했잖어. 얼른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무나 심어. 무는 잘 될 거여.”

아저씨의 위로와 충고가 허탈함을 달랠 순 없었다. ‘아침에 억눌렀던 불길함이 이걸 예견했던 걸까. 웅덩이에 덜컹거리는 일 없었다면 고추도 멀쩡하지 않았을까’ 별 생각이 다 스쳐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저씨는 밭을 내려가시며 “옛날 토종 고추는 탄저병 같은게 없었는데, 요즘 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겄네” 하셨다.

농막으로 향하시는 건 얘기 좀 더 하자는 뜻이다. “아저씨, 이제 토종 거의 없대요. 청양고추도 우리 꺼가 아니라는데요?” “그라믄 어디꺼란 말이여. 청양이 우리나란디.” “미국이 IMF때 사갔대요.” 아저씨와 종자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는데 옆 마을 젊은 이장이 들어왔다. “날 시원허니 일 허기 좋은데 신선놀음이시네요.” 하는데 아저씨가 “신선이고 나발이고 큰 일 났네 이 사람아. 농사꾼들 이제 다 죽어야 써. 씨앗 없으믄 농사는 헛것이여” 걱정을 하신다.

앞으로 대책이 없으면 10년간 청양고추 로열티와 종자값으로 8,000억원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젊은 이장이 TV에서 본 얘기로 거들었다. 인도에서 병충해에 강하다는 면화 종자를 미국에서 수입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재파종(농사로 수확한 씨앗을 다시 뿌리는 것)이 안 되는 ‘불임종자’였단다. 처음엔 쌌는데 20년간 종자가격이 600배나 올랐고 지난 10년간 면화 농민 20만 명이 목숨을 끊은 것도 그 때문이란다. “허, 뭐 이런 경우가 있다냐. 거기도 토종 씨앗은 다 없어졌겠구마” 하시며 아저씨는 한탄을 계속 하셨다.

“옛말에 농부아사(農夫餓死)더라도 침궐종자(枕厥種子)라고 했어.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말이여. 어떤 일이 있어도 종자는 지켜야 그게 농부인디" 아저씨는 요즘 거의 모든 종자를 사다 심는 흐름을 말씀하시며 심각했다. 그래서 여쭤봤다. “아저씨 콩 농사 많이 하시잖아요. 콩 심고 어떤 농약 뿌리면 콩 빼고 300가지 잡초가 다 죽는대요. 쓰실 만 하지 않아요?” 아저씨는 정색을 하시며 대답했다. “그거 안 쓸 미친 놈이 어딨당가!” 다시 여쭸다. “다시 심으면 안 되고 매년 사서 심어야 한다는데도요?” “나도 가끔 사서 심는데 뭐” “아까 그 인도 사람들도 매년 사서 심다가 그런 건데요?” “에이, 그렇게까지 가면 안 되지. 근데 그 놈들은 미국 정부여 아니면 회사여?”

설명을 드렸다. 몬산토라는 곡물 관련 다국적 기업인데 사카린을 개발한 회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화학무기 만들어 팔았고, 베트남에 고엽제(에이전트오렌지) 뿌렸고, 농약회사로 바꿨다가 20년 전부터 유전자 조작하는 회사라고. “못된 짓 대놓고 하는 놈들이네.” 흥분하셨다. “청양고추도 걔네들이 가져간 거래요” 하자 일침을 가하셨다. “경우라고는 쥐 오줌만큼도 없는 놈들이구마.” 그러고는 전망까지 덧붙였다. “쌀 개방이 문제가 아니여. 필히 씨나락(벼 종자) 팔아먹으려고 날 뛸게 분명혀.” 언짢은 마음으로 나가면서 말씀하셨다. “무 배추라도 잘 심어. 종자 잘 받고. 자네도 정신차려!” 아니 왜 나한테...

고추밭 주변을 살피다 보니 올밤(조생종 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예초기를 메고 올라가 밤나무 밑 풀을 베기 시작했다. 가을 밤나무 아래는 메뚜기 마빡처럼 빤질빤질 깎아야 된다고 했다. 풀섶에 숨은 밤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바짝 깎으려다 보니 돌도 많이 튀고, 예초기도 자주 멈춰 섰다. 선선해졌다지만 움직이면 땀 나긴 마찬가지다. 돌에 얻어맞은 정강이를 또 얻어맞아 막 문지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배, 우리 애가 방학숙제를 하는데 논이랑 밭이랑 차이를 모르겠대요. 설명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기운이 빠졌다. “너네 집에 인터넷 없니? 스마트폰이나.” 아직은 대답할 기운이 있지만 얼마나 대답할 수 있을지. “아, 농민이 직접 설명하는 걸 녹음해 가면 점수를 더 준대나 봐요.” 기운이 더 빠졌다. “농민 목소리는 유별나다디? 그냥 니가 하고 내 이름 달면 안되니? 필요하면 주민등록번호도 알려줄게.” 후배는 질겼다. “선배, 그냥 한번만 해주시죠.” 꾹 참았다. “지금 녹음 되는 거지? 그냥 평평하고 키 똑 같은 게 많으면 논이고, 약간 비탈진 데가 밭이야.” 갑자기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논은 왜 평평하고 밭은 왜 비탈져요?” 애 엄마 목소리도 비슷하게 들리는 걸 보니 스피커폰 기능인가 보다. 지들은 멀찌감치 놓고 떠들고 나는 바짝 입에 대고 얘기하는 게 왠지 억울했지만 애써 친절하게 대답했다. “논은 나락을 키우기 위해 물을 고르게 담아야 해서 그렇고 밭은 물이 잘 빠져야 해서 그래요.” 아이가 물었다. “나락이 뭐예요?” 힘들었다 “벼” 아이가 또 물었다. “벼는 뭐고 쌀은 뭐예요?” “벼 깎은 게 쌀.” 힘이 드니 말도 짧아진다. “뭘 심어야 쌀이 나와요?” 아이가 예쁘게 물었지만 하나도 안 귀여웠다. “나락!”

대강 분위기를 읽었는지 후배가 마무리하며 통화했다. “선배, 고맙습니다. 농사 잘 지으시고요, 함 놀러 갈게요.” 아니다, 그냥 전화가 낫다 싶은 생각이 드는데 화가 올라왔다. “야 너 전화 걸어서 통화 가능하세요 아니면 전화 받기 괜찮으세요 뭐 이런 거라도 물어보고 시작해야 되는 거 아니냐? 농사꾼은 뭐 맨날 풀이나 뜯고 있는지 아냐? 이 경우 없는 쉐키야” 그 때 까지 바보처럼 메고 있던 예초기를 내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잠시 뜸을 들이던 후배가 언짢은 투로 말했다. “선배, 여기 스피커폰으로 하고 있었는데 애랑 애기 엄마 다 들었네요. 녹음도 됐고요... 수고하세요.”

그랬다. 아침부터 혀가 씹히고 데인데 이유가 있었던 거다. 각별히 조심하라는 징조였는데. 남들한테 가르치듯 떠들었던 경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전 한국일보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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