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익명 상담·제보 SNS공간...정답 제시보다 호소할 채널 매력
지난해 11월 개설 폭발적 인기
연애상담 편중·비방글 부작용에도 "대가 없는 상담, 격려메시지 뿌듯"
“대나무 숲 운영의 생명은 ‘익명성’입니다. 그냥 ‘서울 대나무 4호’라고 불러주세요.”
22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울대 대나무 숲 운영자 정모(22)씨는 철저히 자신을 감춰줄 것을 부탁했다. 대나무 숲이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말을 익명으로 속시원하게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인 만큼 운영자의 익명성이 보장돼야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운영자들 중 일부는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문자메시지로만 소통한다.
각 대학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학교 대나무 숲’은 최근 대학 새내기들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기고 있는 일종의 익명 제보 및 상담 게시판이다. 재학생들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같은 은밀한 얘기나 고민을 익명으로 털어 놓거나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 예를 들어 ‘새내기 여학생인데, 월요일 ○○수업을 같이 듣는 선배가 자꾸 눈에 밟혀요’라는 글을 운영자에게 보내면 운영자는 이 글을 익명으로 게재한다. 이때 운영자가 짤막한 코멘트를 달거나, ‘선배 오빠’를 잘 아는 다른 회원이 ‘이미 여자친구가 있어요’ ‘○○한 스타일을 선호해요’ 등의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대나무 숲은 대학들 중 서울대가 가장 먼저 도입했다. ‘서울 대나무 1호’인 이모(21)씨가 지난해 초 싱가포르 국립대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현지에서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컨페션(confession)’이란 인터넷 사이트가 대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에 착안했다. 귀국 후 한국 대학생들의 기호에 맞는 페이스북에 공간을 마련하고 운영하기 시작한 게 대나무 숲이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이후 현재 5,717명이 페이지를 공유해 정기구독하고 있고 타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대학마다 홈페이지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구축해 놓고 있지만 SNS에 익숙한 새내기들은 좀 더 사적인 내용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나무 숲을 더 선호한다. 인기 비결에 대해 4호는 “고민에 대해 정답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뭔가 말을 할 수 있게 곁을 내주는 소통채널로도 충분히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연애관련 글들로 편중돼 ‘다양한 고민 나누기’라는 취지가 훼손되기도 하고, 특정인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저격 글’이나 외설 수위의 글들도 많다. 4호는 “취지 자체가 ‘필터링의 최소화’인 만큼 제보 글의 게재 여부를 놓고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운영자들도 고민이 많다. ‘돈도 안 되는’ 일에 무한정 시간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서울대 대나무 숲 1~3호는 군입대를 했거나 입대를 앞두고 있다. 공개채용을 거쳐 운영자 8호까지 선발했지만, 하루 100개가 넘는 제보 글이 올라오다 보니 일일이 댓글을 달지 못한다. 고민 내용이 꿈에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4호는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상담 스트레스로 인해 위장병이 도지고 식도염이 악화해 잠시 운영진을 떠나 있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래서 가끔은 회의감이 들지만,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어요’ 등 격려메시지를 받으면 힘이 난다고 한다.
글ㆍ사진=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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