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이유로 역사적 사실 누락
현충사 성역화 작업도 균형 잃어
교과서, 역사인식 좌우하지 못해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초등학교 때 부르던 ‘유관순 누나’ 노래다. 2절 가사는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1절은 지금도 정확히 부를 수 있다. 워낙 자주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 노래로까지 배웠던 다른 역사인물은 이순신 장군이 유일했다. 이런 노래였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니/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우리도 님의 뒤를 따르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역사인물로 배웠기 때문에 어린 시절 ‘유관순 누나’의 이미지는 ‘한국의 잔 다르크’에 가까웠다. 3ㆍ1 독립만세 운동이 외적(外敵)의 침입에 맞서는 군사행동과는 다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17세 소녀의 몸으로 아우내장터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고,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그치지 않다가 고문으로 숨져간 그의 행적이 어쩐지 잔 다르크와 닮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친구들에게 확인해보니 그런 이미지가 유난한 것도 아니었다. 같은 교육과정을 거친 동세대의 인식이 대체로 그랬다.
그러니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이 유관순 열사를 일절 다루지 않았다는 소식이 충격일 수밖에 없다. 3ㆍ1 운동을 기술하면서 상징성으로는 33인보다 더 큰 유관순 열사에 대한 기술을 어떻게 빠뜨릴 수 있을까. 기술 누락의 이유로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역사학계의 연구성과’가 제시된 것은 더욱 충격적이다. 그 연구성과를 굳이 검증할 것도 없다. 친일파가 발굴해 띄워서, 원래 그 정도는 아니었던 유관순 열사가 노래로까지 불릴 정도로까지 지나치게 떴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의 만세운동과 옥중 순국이 날조된 것도 아니고, 3ㆍ1 운동의 전국적 성격과 일제 탄압의 잔학성을 동시에 드러내기에 그만한 인물이 없다.
그래도 친일파가 띄운 사람이어서 폄훼(貶毁)할 수밖에 없다면,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비슷한 자세를 보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영화 명량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리던 지난 주말 40여년 만에 아산 현충사를 찾았다. 중3 때 속리산 수학여행 길에 잠시 들렀던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 사이 수목이 크게 자라 자연공원 같은 느낌이 든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부지와 시설 규모가 엄청나 새삼 놀랐다. 이순신 장군의 공적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세종대왕을 비롯한 한국사의 다른 위인들을 현창(顯彰)하는 시설에 비해 현충사는 너무 컸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을 들여 매달렸던 현충사 성역화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느낌이 확연했다.
대학시절 박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비롯한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무인(武人)의 역사적 업적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5ㆍ16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군사 독재’에 대한 비판 의식을 희석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그 정도의 의심이 아니더라도, 진보사학계에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진보학계가 친일파의 핵심이자, 비판해 마지않은 군사독재와 10월 유신의 장본인 아니던가. 그런 박 대통령이 본격적이고 대대적으로 띄운 인물이니, 이순신 장군도 평가절하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유관순 열사를 누락한 한국사 교과서를 만든 출판사나 집필자를 탓할 것만도 아니다. 어떤 이유로 누락했든, 집필자가 어떤 사관을 갖든 집필 단계에서의 학문과 양심의 자유는 존중돼 마땅하다. 다만 검정 절차에서 중대한 오류는 걸러져야 하고, 무리한 누락이나 과잉 기술도 수정ㆍ보완돼야 한다. 모든 검정 절차를 거쳐 교육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교과서에 유관순 열사가 누락된 것은 검정절차의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검정위원들과 그 선정 등에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한 국사편찬위원회와 교육부의 책임인 셈이다. 모두들 한결같이 유관순 열사를 누락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또한 이 문제로 보수ㆍ진보세력의 역사 갈등이 재연되거나 국정교과서 체제로의 회귀 주장에 순식간에 힘이 붙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 경험상 교과서는 그저 교과서일 뿐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좌우하지는 못한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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