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학교 현실 보고 시나리오 확 뜯어고쳐
올해 초 베를린영화제 초청받아
난 게이이기 이전에 영화인, 커밍아웃 1호 감독 수식어 싫다
폭력적인 위계질서, 입시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교사들 그리고 동성애…. 혀를 내두를 불편한 소재를 다룬 영화 한 편이 추석을 앞둔 극장가를 찾아왔다. 28일 개봉한 ‘야간비행’은 일찌감치 성소수자임을 밝힌 독립영화계의 스타 이송희일 감독의 신작이다. 국내 독립영화 진영에서 퀴어영화(성 소수자를 소재로 한 영화)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증명한 이가 바로 그다. 2006년 개봉해 관객 4만5,000여명을 모은 ‘후회하지 않아’가 대표작 중 하나다.
‘야간비행’은 올 초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됐다. 중학생 때 친했으나 고등학생이 된 뒤 역학관계의 변화에 따라 서먹해진 세 친구를 중심으로 학교 폭력, 왕따, 우정과 배신, 정체성의 혼돈 등을 다룬다. 젊은 나이에 미혼모가 된 어머니를 둔 1등급 우등생 용주(곽시양)와 학교 폭력의 희생양이었다가 폭력 서클의 우두머리가 된 기웅(이재준) 사이의 모호한 긴장감이 극을 이끈다.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송희일 감독은 ‘야간비행’이 2009년쯤 8부작 드라마로 먼저 기획됐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영화가 위기에 처하면서 독립영화계도 힘들어져 영화 대신 대안 드라마 형태를 기획했습니다. 고등학생부터 시절부터 성인이 된 뒤까지의 성장드라마였는데 드라마보다 앞선 시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말이 나와 고교생 이야기를 써뒀어요. 투자가 잘 안 돼 서랍에 묵혀뒀다가 2012년 ‘백야’로 베를린영화제에 다녀오던 중 프로듀서와 ‘영화로 만들어 베를린 다시 가자’고 했던 게 현실이 됐습니다.”
대구 청소년 자살 사건을 접한 뒤 이송희일 감독은 충격을 받고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두 주인공 위주였던 대본이 학교 시스템의 복잡한 구조적 문제 때문에 고통 받는 청소년들의 성장담으로 변했다. 그는 “피해자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되는 과정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관객에게 듣고 싶었던 질문은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것이었다.
제작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동성애자가 나오는 영화라는 탓에 캐스팅 과정부터 벽에 부딪혔다. 동성애가 핵심 소재가 아닌데도 모두들 손사래를 쳤다. 배우는 하겠다고 했지만 부모가 반대해 포기해야 했던 경우도 허다하다. 그는 캐스팅 과정이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처럼 막막했다”고 회상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1999년 있었던 실제 사건에서 힌트를 얻었다. 한 학생이 동급생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울고 있는데 평소 말수 없이 조용하던 다른 학생이 친구를 괴롭힌 아이들에게 복수한 사건이었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자면 복수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힘의 권력 관계를 정지시키고 유예하는 ‘신적 폭력’으로 보였으면 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송희일 감독은 “앞으로는 퀴어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현재 준비 중인 영화도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적 멜로영화다. “1990년대 말 영화계에서 아무도 커밍아웃 하지 않을 때 외롭게 커밍아웃 한 뒤 단편부터 만들어 왔지만 전 게이이기 전에 영화인입니다. ‘커밍아웃 한 1호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싫어요. 독립영화를 찍어왔지만 대중영화, 장르영화를 더 좋아해요. 한국의 퀴어영화 1세대로서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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