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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장외투쟁

입력
2014.08.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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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2일은 한국정치사에 굵은 점이 찍힌 날이다. 전년의 ‘2ㆍ12 총선’에서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인의동 당사에서 열린 1주년 기념식에서 ‘직선제 개헌 1,00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기념식에 앞서 “바쁘더라도 기념식을 끝까지 지켜보라”는 당시 홍사덕 대변인의 이례적 귀띔이 아니었다면, 견습 딱지를 뗀 지 4개월밖에 안된 햇병아리 기자는 역사적 현장을 놓칠 수도 있었다. 당시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ㆍ김대중 상임고문 등 고위당직자를 빼고는 소속의원 대부분도 몰랐다.

▦ 이 총재는 기념사를 마친 뒤 “오늘 뜻 깊은 2ㆍ12 총선 기념일을 이대로 넘길 수 없다”며 개헌서명운동을 제의했고, 김영삼 상임고문이 ‘개헌서명운동 시작에 즈음하여’란 특별성명을 통해 이 총재의 제의를 추인했다. 성명서 낭독을 마친 김 상임고문은 윗옷 주머니에서 김대중 상임고문이 미리 셋째 칸에 서명해 둔 서명 명부를 꺼내 보이며 서명운동 돌입을 선언했다. 같은 시간 서소문의 민추협 본부에서는 김대중 공동의장이 서명운동 시작을 선언했다.

▦ 신민당의 본격적 장외투쟁은 한 달 뒤인 3월 11일 서울시지부 대회로 시작된 개헌추진 시도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통해서였다. 신민당과 민추협은 당사 수색과 봉쇄, 가택연금 등을 무릅쓰고 결성대회를 강행했다. 국민들의 호응도 전폭적이었다. 적어도 ‘5ㆍ3 인천사태’로 결성대회를 통해 직선제 개헌 이외의 급진적 주장이 나온 때까지는 그랬다. 6월 국회 개헌특위 구성과 함께 신민당은 개헌투쟁의 무대를 국회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6월 항쟁과 6ㆍ29 선언을 거치고서야 직선제 개헌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 신민당의 장외투쟁이 멋지게 성공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집회와 시위를 엄격히 통제한 권위주의 시절, 정당은 그나마 일부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또 비록 침묵하고 있었지만 많은 국민이 직선제 개헌을 바라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 그런 조건이 크게 바뀌었다. 우선 정당이 앞장 서지 않아도 할 말 못할 국민이 없다. 야당이라고 가중치를 얹어주던 민심의 지형도 광우병 촛불시위를 마지막으로 평평해졌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장외투쟁 소식이 시대착오적 바보짓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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