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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에서 나 개성 선죽교에서 죽임당한 정몽주...용인에 묻힌 까닭은

입력
2014.08.2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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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 거리에 가문 다른 두 거인의 묘

묏자리 악연 이야기도 재미 있지만 단심가 詩碑에 선비의 절개 오롯하고

드라마 '정도전' 충절의 상징 인기, 아이부터 노인까지 관광객 크게 늘어

포은대로, 포은교, 포은아트홀, 포은문화제….

경기 용인을 지나다 보면 유독 ‘포은’이란 단어를 많이 만나게 된다. 포은은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 선생의 호로 용인 처인구 모현면에 포은의 묘가 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손에 살해 당한 정몽주 선생의 묘가 왜 용인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생전 포은 선생과 용인과의 인연은 문헌상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다지 연관 없는 곳에 묏자리가 있는 것이다.

그 연유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방원은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으로 즉위 후 6년 뒤인 1406년, 자신이 죽인 정몽주 선생을 복권시키면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개성 풍덕에 가묘 형태로 모셨던 선생의 유해를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토록 했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상여가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부근을 지날 때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에 선 명정(銘旌ㆍ죽은 사람의 관직 등을 적은 천)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을 잡기 위해 후손들이 따라가 보니 지금의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에 떨어졌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들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곳에다 묘를 쓰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들어왔던 다른 묏자리와 관련된 전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포은 선생의 묘에는 제2탄이 이어진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자락에 정몽주 선생의 묘(왼쪽)와 이석형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자락에 정몽주 선생의 묘(왼쪽)와 이석형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은 포은 선생의 묏자리를 팠지만 날이 저물어 하관(下棺)은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인부들에게 묏자리를 지키도록 하고 먼 행렬에 피곤한 후손들과 유림들은 곤한 잠이 들었는데, 단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이가 있었다. 바로 정몽주 선생의 증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 보다는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 그 자리를 탐했다. 정씨 부인은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묘 인근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묏자리에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보니 묏자리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후손들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하고 탄식을 했고, 옆 언덕을 보니 그곳도 명당인지라 정몽주 선생을 모셨다.

그럼 처음 명정이 떨어졌던 자리는 어찌 됐을까. 훗날 정씨 부인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그곳에 남편과 합장을 해달라고 지목했고, 정씨 부인과 그의 남편으로 대사헌을 지낸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자리를 잡았다.

명당의 기운을 받아서일까 실제 연안 이씨인 이석형 선생의 후손들은 날로 번창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손들이 250여명에 이르렀고 대제학과 정승, 판서 등이 끊임 없이 배출됐다. 월사 이정구 선생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조선조의 문장가로도 명성을 떨치면서 연안 이씨는 조선 3대 명문가로 꼽혔다. 반면에 정몽주 선생의 후손 중에서는 조선조에서 이렇다 할 출세를 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묏자리를 두고 벌인 두 집안의 악연 때문인지 한때 모현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 연일 정씨와 연안 이씨는 서로 혼사를 치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김 국장은 “포은 선생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는 관직에 나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거의 없었다”며 “묏자리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포은 선생이 조선의 임금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관직을 얻는 것은 불효라 여겨 일부러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고 설명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의 짓궂음으로 빚어진 얘기이려니 생각하고 포은 묘역을 찾았다. 이야기대로 능원리 문수산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과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채 10m도 안되는 거리에 나란히 있다. 이석형 선생이 정몽주 선생의 증손녀 사위라고는 하지만 가문이 다른 두 사람의 묘가 이리 가까운 거리로 나란히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것도 명문가의 대표격인 인물들의 묘가 말이다. 일화가 나올법했다.

포은 묘역은 왕릉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규모다. 입구에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각이 있고 커다란 홍살문이 참배객들을 맞이했다. 홍살문을 지나자 낡은 한옥 3채가 있는데 경모사, 모현당, 영모재다. 경모사에는 관리자가 거주하고 있고 모현당은 각종 제례행사나 종중회의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포은 선생이 직접 쓴 행서 편판이 걸려있고 제향을 위해 지은 영모재에는 우암 송시열의 편액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쉽게도 이곳의 내부를 볼 수가 없다. 건물이 노후돼 중건이 계획 중이다.

영모재를 지나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이어지는 ‘단심가’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로 시작하는 ‘백로가’ 시비가 묘역의 시작을 알린다. ‘백로가’는 포은 선생의 어머니가 지은 시로 아들에 뒤지지 않는 절개가 느껴진다.

이석형 선생의 묘 바로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다. 못에는 물오리도 떠다니고 잉어와 금붕어가 뻐끔거린다. 묘역 정비를 하며 후대에 만들어진 연못이라는데 기존에도 이곳에 자그마한 물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정씨 부인이 묏자리에 물을 길어온 웅덩이가 이곳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포은 선생의 묘를 향해 오른다.

포은 선생의 묘까지는 돌판이 길을 안내한다. 명당은 명당인지 겨우 몇 걸음 올라왔을 뿐인데 돌아본 풍경이 아늑했다. 묘를 지키는 석물 등은 조선초기 사대부 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한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정도전’의 인기 때문인지 최근에 참배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받는 곳이 아니다 보니 정확한 인원 파악은 되지 않지만 배 이상 늘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부모의 손을 잡은 채 정몽주 선생의 충절에 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아이들부터 드라마를 보다 정몽주 선생을 흠모하게 됐다는 노인분들까지 참배객들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버스를 대절한 단체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찾아온다.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서는 매년 5월이면 선생의 넋을 기리고 그의 충절과 효, 뛰어난 정신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포은문화제가 열린다.

용인=김기중기자 k2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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