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한은 예상과 달리 규제 완화·금리 인하 등 따라 대출 증가 속도 빨라져
생활자금으로 이용도 많아 빚 상환 땐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
#재건축 단지가 많이 몰려있는 우리은행 잠실역지점은 부동산 시장 비수기인 8월에 들어서며 대출창구 분위기가 오히려 좋아졌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및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 이후 상담 건수가 부쩍 늘었다. “각 은행별 금리를 확인하고 대출 계약하는 고객이 많아 모든 상담이 곧장 거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산했던 여름 대출창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게 박상훈 지점장의 말이다.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3억 5,0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과 1억원의 신용대출을 이용하고 있던 40대 중반의 대기업 직장인 A씨는 이달 대출 규제 완화 소식을 듣고 은행을 찾았다. 그는 늘어난 대출 한도로 1억 5,000만원의 추가 담보대출을 받아 고금리의 신용대출을 전액 상환했다. 그는 나머지 돈은 미국 유학 중인 자녀를 위해 쓸 계획이라고 했다.
대출 규제를 풀더라도, 또 기준금리를 낮추더라도 가계 빚 증가세는 가파르지 않을 거라는 게 정부와 한국은행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조짐이 심상찮다. 완만한 증가세야 정부의 내수활성화 대책이 기대했던 효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증가 속도는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가계부채의 뇌관을 더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얘기들이 흘러 나온다.
국민ㆍ우리ㆍ신한ㆍ하나ㆍSC 등 5개 은행에서 이달 들어 22일까지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은 2조2,437억원. 이미 지난달 전체 증가액(1조887억원)을 넘어선 것을 감안하면 지난 달에 비해 주택대출은 3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8월에 이뤄진 대출은 실제 대출 신청이 그 이전에 이뤄진 것도 적지 않은 만큼 모두 대출 규제 완화나 기준금리 인하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 이달 들어 대출 신청이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도 확인된다. SC은행의 경우 1~22일 주택담보대출 신청금액이 9,275억원으로 전달 신청액(3,137억원)의 세 배에 육박한다. 박종관 SC은행 개인여신상품부장은 “확실히 이달 들어 고객의 상담 문의가 늘어나는 등 대출창구가 이전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돈을 빌려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는 점이다.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 거래 시 자금 용도를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고 있지만, 실제 주택구입 용도로 이용되는 대출 비중은 60~7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가 대출 규제를 풀어주고 금리를 낮춰주니까 자금난을 겪던 가계들이 추가 대출에 나섰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얘기. 정부의 의도대로 부동산 거래를 활성화하기는커녕 빚 상환 부담만 더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정책 효과가 나타나기엔 이른 시간이어서 생활비 등 주택구입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게 더 많은 것 같다”며 “한계 상황에 이른 사람이 생활비나 창업자금 등의 용도로 빚을 늘릴 경우 가계부채의 질은 크게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부동산 시장 비수기인 8월에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한 것을 감안하면 본격적인 이사철이 시작되는 9월 이후에는 대출 증가세가 더 가팔라질 수 있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이사철이 되면 더욱 부동산 구입 목적으로 빌리는 수요가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가계부채를 연착륙시킬 수 있는 후속 대책을 모색해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재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준금리 인하와 대출요건 완화로 빚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만큼 정부는 모니터링을 철저히 해야 한다”며 “주택구입이 아닌 다른 목적만 늘어나는 대출이라면 정책 변경을 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명숙 우리은행 고객자문센터 부장은 “금리가 낮다고 해도 부동산 수요가 높지 않은 데다 경기불황인 상황이라 신사업 등이 많지 않아 무분별하게 부채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담보대출 규제 완화는 부동산 시장을 비롯한 경제활성화의 단기처방 중 하나일 뿐인 만큼 상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소득 증대 방안 등이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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