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이란 책으로 알려진 얼 쇼리스의 책이 또 한 권 번역됐다. 인문학은 자유다란 책이다. 얼 쇼리스는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가난한 사람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의 인문학 운동가다. 실제로 그는 뉴욕에 노숙인, 마약중독자, 재소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철학과 문학, 예술 등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성과는 놀라웠다. 코스를 수료한 마약중독자, 재소자들이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이 중 몇몇은 박사가 됐고, 치과의사, 간호사, 패션 디자이너가 됐다. 여기에 힘입어 그는 미국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 코스를 확대했다. 최근 번역된 책은 전 세계에서 이 코스를 진행하며 겪었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유작이다. 가난한 이가 인문학을 공부하면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과 영국, 프랑스의 중산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한국 중산층의 기준은 부채 없는 30~40평형 아파트, 월수입 500만원 이상, 배기량 2000cc 이상 자동차, 1억원 이상의 통장 잔고, 매해 해외여행을 떠날 것 등이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 뿐이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기준에 돈은 없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나만의 주장과 신념을 지닐 것, 독선을 버릴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의연할 것, 불의와 부정에 저항할 것 등으로 윤리와 사회, 정치적인 가치뿐이다. 여기에 외국어를 구사하며 넓은 세계를 경험할 것,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루고 스포츠를 즐길 것, 나만의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대접할 수 있을 것 등 문화적인 기준이 추가되는 정도다.
이를 두고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다. 사회안전망으로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된 서구에서는 지식과 문화, 사회적인 신뢰나 명예 같은 것들이 중시되는 반면, 그것이 없는 한국에서는 돈 밖에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었다. 삐끗하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회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돈으로만 이뤄진 한국 중산층의 기준은 우리의 아픈 현실을 반영한다.
책임이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야 어찌되건 내 땅값, 아파트값을 올려주겠다는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다 보니 이런 척박한 사회를 만들지 않았는가. 사람의 생명이든, 뭐든 돈으로만 바꾸려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다 보니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희망의 인문학은 우리가 오해하듯, 인문학으로 돈을 벌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성찰하는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나 못지않게 이웃이 귀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것이다.
지난 휴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광화문 단식 농성장을 찾았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건강 악화로 자리를 비운 농성장에는 동조 단식을 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람이 죽든 말든 모르쇠로 일관하는 청와대나 정치권의 움직임으로 보아 특별법의 전망은 밝지 않다. 그럼에도 단식을 하는 시민들의 얼굴에 어려 있는 기운은 절망이나 초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분노와 고통 속에서도 농성장에 넘치는 건 나눔과 배려와 사랑이었다. 눈물 흘리는 이들과 아픔을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한 신뢰와 자랑스러움 같은 것들이었다.
유민 아빠와 시민들의 단식으로 우리는 전에 없던 것들을 얻고 있다. 어려운 시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과 연대라는 인식이다. 진정 잘 살기 위해 돈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깨달음이다. 얼 쇼리스가 인문학으로 범죄와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인문학으로 돈을 버는데 도움을 준 때문이 아니다. 인간에게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 덕분이다. 돈이 없어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들이 희망과 자존감을 갖게 한 덕분이다. 우리에게 인문학으로 가능한 성취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이웃이 아파하며 더위와 허기를 견딜 때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지금 광화문의 뜨거운 천막은 인문학의 실천 마당이자 성지이기도 하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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