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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림은 늙을 줄 모른다

입력
2014.08.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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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소설 어느 여인의 초상의 주인공 이사벨 아처는 부모를 잃은 뒤 이모 터쳇 부인을 따라 영국의 시골 마을로 오게 된다. 권태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터쳇가와 그 사람들에게 이사벨은 말 그대로 새로운 땅에서 불어온 한 줄기 신선한 바람같은 존재다. 그들은 우아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삶은 오래된 성채와 같이 생기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매력적인 처녀 이사벨을 기꺼이 자신들의 성채에 받아들인다. ‘호기심 넘치고 생기 가득한, 젊고 아름다운 미국여성 이사벨 아처’라는 제목을 단 멋진 초상화로서 말이다. 실제로 그녀는 내내 모두로부터 그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사촌 랠프는 그녀가 마음껏 근사한 삶을 펼쳐나가는 것을 감상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그녀를 부유한 상속녀로 만들어준다. 자신만의 이사벨 아처 초상화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행위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꿈에라도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녀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근사한 청혼자들이 다가오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해버린다.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정반대의 남자 길버트 오스몬드다. 그는 가난하고 나이가 많으며 장성한 딸까지 있지만 이사벨은 바로 그런 오점들을 진정한 사랑의 증표로 여기며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이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우려는 현실로 드러난다. 이사벨의 짐작과는 달리 오스몬드는 누구보다도 이사벨을 한 폭의 초상화로서 애호했고, 그래서 소유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비뚤어진 소유욕과 탐미주의를 이사벨은 결혼 전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자신만의 오스몬드 초상화에 사로잡혀 진실에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으로 굴절된 상대를 진짜라 믿으며 상대의 본 모습에는 눈을 감아버린 그들의 결혼생활은 당연하게도 불행 속으로 빠져든다. 이사벨은 뒤늦게 자신의 이기심과 순진함을 후회해보지만 늦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오스몬드의 딸이 그와 자신을 연결시켜줬던 멀 부인과의 불륜에 의해 태어난 존재이며, 오스몬드가 자신의 돈을 노려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충격에 빠진 그녀는 오스몬드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독한 사촌 랠프를 보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소설은 이사벨의 친구를 통해 그녀가 오스몬드가 있는 로마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전하며 갑작스레 끝난다. 나는 이것이 이사벨이 오스몬드와 결판을 내려고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영화 본 수프리머시가 주인공이 뉴욕으로 향하며 끝나는 것처럼), 그녀가 자신의 운명에 굴복해버린 것이라는 해석도 많았다. 하지만 결말에 제시된 정보만으로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간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이사벨이 오스몬드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림 같은 세계 속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선의 넘치는 이사벨의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공들여 그린 어떤 명화의 카피본에 가깝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사벨은 어딘가 이상하더라도 자신의 삶이 원본이고자 하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야망이 가져온 최악의 결과 앞에서 이사벨은 미련할 정도로 책임감을 느낀다. 독자와 등장인물들의 기대나 희망과 달리 그녀는 쉽게 오스몬드를 떠나지 못한다. 그녀의 이 미련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언제나 변함없는 선의의 태도로 그녀를 대하는, 그녀를 변화시킨 실패의 시간들이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그녀가 하루 빨리 예전의 그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니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주변인들의 선의를 빙자한 욕망의 성스러운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넌 다시 어려질거야.’ 사촌 랠프는 아주 늙어버린 것 같다고 한탄하는 이사벨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감동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사벨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지한 젊음의 반복이 아니라, 성숙한 늙음일 것 같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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