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색정광을 소재로 한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에는 기묘한 대화가 나온다. 아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살아온 남성을 두고 주인공 조(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칭찬할 만하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인생을 부정(否定) 속에서 살아오면서도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상대에게 “성욕은 인간에게 가장 큰 힘인데 수치스러운 욕망을 실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상이라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조라면 영화 ‘셰임’의 섹스 중독자 브랜든(마이클 파스벤더)을 누구보다 잘 보듬어줄 것 같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섹스에 탐닉하는 조와 달리 브랜든은 섹스 모험가가 아니다. 그는 단지 시도 때도 없이 넘치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을 뿐이다. 전형적인 미국 뉴욕의 중산층 백인 독신남인 그는 욕구를 풀기 위해 집에서든 사무실에서든 밖에서든 화장실 드나들 듯 섹스를 한다. 그것이 그에겐 수치(shame)다.
최근 한 법조인의 추문을 읽으며 ‘님포매니악’의 그 대화 장면과 ‘셰임’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수치스런 욕망을 타고난 사람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조의 말처럼 성욕은 인간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인데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외롭고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욕망을 제거하든 아니면 해소하든.
‘셰임’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감독이 섹스 중독자 브랜든과 바흐를 연결하는 장면들이다. 첫 장면부터 의미심장하다. 회사에서 돌아온 그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LP의 첫 곡 ‘아리아’ 부분에 턴테이블 바늘을 올려놓는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긴 중국음식과 맥주를 꺼내 들곤 노트북을 열어 포르노 동영상을 본다. 이 과정은 일상적이면서도 하나의 의식처럼 보인다.
영화엔 바흐의 곡이 네 차례 나온다. 앞선 두 번은 브랜든이 직접 듣는 화면 내 음악이고 나중 두 번은 감독이 브랜든과 관객을 위해 덧입힌 화면 밖의 음악이다. 브랜든이 두 번째로 바흐의 음악을 듣는 건 이어폰을 통해서다. 그는 직장 상사와 여동생이 자신의 집에서 뒹굴고 있는 걸 확인하고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채 야간 조깅에 나서며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10번 E단조를 듣는다. 감정과 음악의 대조가 극단적이다. 지극히 평온하고 조화로운 굴드의 바흐 연주가 내적 모순의 소용돌이에 빠진 브랜든이 스스로를 억압하기 위해 쓰는 형틀처럼 들린다.
굴드의 바흐 연주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자기혐오와 자학에 몰두하느라 여동생을 외면했던 브랜든은 집에 돌아와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는 여동생을 발견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브랜든의 절규 대신 굴드의 정갈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 16번 G단조 연주를 내보낸다.
바흐는 연주자들의 음악적 기량을 향상시킬 교육적 목적으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균율은 옥타브를 수학적으로 등분해 그 단위를 음정 구성의 기초로 삼는 음률 체계로 주로 12개 반음으로 나눈 12평균율을 가리킨다. 12개 반음을 기초로 장조와 단조로 만든 24곡(두 권 48곡)으로 구성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니스트들에게 구약성서로 일컬어진다.
브랜든은 분명 수학적인 조화를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이 예술작품을 사랑했을 것이고 자신의 삶도 조화롭고 아름답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육체를 벗어나지 않으면 버릴 수 없는 그 욕망과 수치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의 내면은 진창이었다. 그가 수많은 연주자 중 글렌 굴드를 선택한 건 이 천재 연주자가 스스로를 ‘마지막 청교도인’이라고 할 만큼 금욕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음악을 듣는 브랜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공감했을까.
*고경석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kave@hk.co.kr)가 영화 속 음악 이야기를 소개하는 ‘그 영화, 그 음악’을 연재합니다.
▶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10번 E단조
▶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
▶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 16번 G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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