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문턱을 넘고 있지만 여름을 즐기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매미는 청선(淸蟬)이라 하여 그 맑은 울음소리를 듣고 조선의 선비들은 더위를 잊곤 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방충망에 붙어 밤잠을 설치게 하는 매미는 그 울음소리가 그리 맑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어느 날 매미를 쳐서 날려 보내고서는 문득 18세기 호남의 실학자 위백규(魏伯珪)의 글을 떠올렸다. 일상의 비근한 것을 두고 삶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격물(格物)의 공부라 한다. 위백규는 ‘격물설(格物說)’이라는 글을 지어 공부한 내용을 담았다.
“살면서 다른 사물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는 매미다. 오직 그 요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물과 다툼이 없어, 긴긴 여름 천명을 누리면서 맑은 그늘을 골라 그 즐거운 뜻을 울음 운다. 서늘한 바람이 이르면 조물주의 뜻에 순응하여 돌아가 숨는다. 어찌 신선의 성품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대해 어떤 이가 매미 울음이 귀를 매우 시끄럽게 하여 밉다고 하면서 소리를 내지 않는 놈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위백규는 “귀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 중 태반은 다른 사물을 해치는 것이거나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밤낮으로 자네의 귀를 시끄럽게 하는데도 미워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그를 좇아서 그 시끄러움을 조장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되물었다. 뜨끔하다. 저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는 싫고 돈과 권력을 좇아 빌붙고 해코지하는 소리는 즐거워하고 있지 않은지?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할 때 조물주는 고추잠자리를 보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18세기의 시인 이규상(李奎象)은 ‘농가의 노래(田家行)’라는 작품에서 고추잠자리와 함께 가을이 오는 모습을 그림처럼 그렸다. “맨드라미 오뚝하고 봉선화 기우뚱한데, 푸른 박 넝쿨엔 붉은 가지가 얽혀 있네. 한 무리 고추잠자리 왔다 가고 나니, 높은 하늘 마른 햇살에 가을이 생겨나네.(鷄冠逈立鳳仙橫 瓠蔓?莖紫翠? 一陣朱?來又去 雲高日燥見秋生)” 한 무리의 고추잠자리가 지나가니 이를 기다린 듯이 습기가 줄어들고 마른 햇살이 비친다. 뭉게구름 사라진 푸른 하늘이 더욱 곱다. 아, 이렇게 가을이 오나 보다.
잠자리 몇 마리를 보고 가을을 느낀다고 하는 시인의 말을 마뜩하게 여기지 않는 이도 있겠지만, 위백규는 잠자리를 두고 공부를 하였다. “음력 7월이 올 무렵에 나타나는 노랗고 작은 잠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선득선득한 기운이 막 생겨나고 장맛비가 막 개일 때, 떼를 지어 날면서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은 분명 초가을의 풍경이다. 조물주가 사물을 이용함에 그 장점을 취할 뿐 다 갖추어지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음이 또한 이와 같다. 저들이 계절을 즐거워하니, ‘임금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 기상이라 하겠다. 새나 곤충이 절로 울음을 울고 절로 기뻐하는 것은 대부분 이와 같은 법이다. 사람이 사물을 직접 보고 그 정(情)을 터득하는 것으로도 심성을 수양할 수 있다.”
한여름에 나타나는 잠자리 한 마리도 심상하게 보아 넘기지 않는 것이 조선 선비의 눈이다. 위백규는 잠자리가 가을을 맞아 즐겁게 나는 것을 보고, 태평시대 함포고복(含哺鼓腹)의 ‘격양가(擊壤歌)’를 떠올렸다. 요(堯) 임금 시절에 한 노인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나니, 내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내 밭을 갈아서 밥을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노래한 바 있다. 잠자리는 가을이 오는 것을 알고 순응하여 즐거워할 줄 알지만, 사람들은 더위를 괴로워만 할 뿐 잠자리를 보고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깨닫지 않는다. 미물도 알아차리는 계절의 변화를 사람만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잠자리가 물을 치면서 나는 것을 청정점수(??點水)라 한다. 벼슬과 이익의 급류에서 몸을 빼지 못하고 집적대는 것을 두고도 청정점수에 비유한다. 가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잠자리를 보고 언제 돈과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격물의 공부이리라.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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