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배를 곯아도 다음 농사에 쓸 씻나락 마저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진두지휘로 정부는 지금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한 정책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잘살게 해준다니 웬만하면 너그러이 지켜보려 했지만 일부 대목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다. 특히 산에서 벌어질 삽질만큼은 반드시 막아야겠다.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조성과 산악관광 활성화 방안이 발표됐다. 그간 양양군이 추진해온 설악산 케이블카는 지난 2012년 6월과 지난해 9월 두 차례나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심의가 부결된 사업이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이 사업을 내년 하반기 착공을 목표로 세밀한 일정까지 못박아 가며 밀어붙이고 있다. 양양군에겐 부적합 사유를 보완해 케이블카 설치 변경안을 내년 상반기 중에 제출토록 하고, 환경부에겐 케이블카가 국립공원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게 양양군의 사업계획서 작성을 위한 자문을 하도록 하겠단다. 환경을 지키라고 있는 환경부에게 환경을 망가뜨리는 걸 도우라 강권하겠다는 이야기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놓아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는 전근대적 발상을 스위스 융프라우 등을 예로 들며 설파하는 데에선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해외여행을 별로 해보지 못한 작자가 어쩌다 융프라우 한 번 다녀와선 고작 그 알량한 견문으로 한국 관광산업의 대단한 비책을 발견한 양 떠벌리는 듯한 느낌이랄까. 만년설을 이고 있는 해발 3,000~4,000m의 알프스와 우리 백두대간의 산자락을 비교하는 건 시작부터가 이미 난센스다. 그리고 융프라우는 관광과 휴양을 위해 개발된 곳이지 국립공원이 아니다.
1872년 옐로스톤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며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이란 제도를 만든 미국의 국립공원청(NPS)은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제일의 사명을 이렇게 써놓고 있다. “국립공원청은 현 세대 및 미래 세대가 즐기고 배우며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훼손되지 않은 자연적 문화적 자원과 국립공원 시스템의 가치를 보존한다.” 이렇듯 미국 국립공원은 자연과 문화자원의 보존이라는 책무를 바탕으로 이를 훼손하는 어떤 인공시설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중 보존해야 할 대상은 생태계도 있지만 경관도 주요 대상이다. 그 많은 미국의 국립공원에 케이블카가 단 한 대도 없는 까닭이다.
물론 미국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초창기 미국의 국립공원은 휴양지로서 기능이 강조되면서 인공시설물이 범람을 이뤄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휴양 보다는 자연경관의 보존과 야생 동식물의 보호가 우선돼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에 따라 엄격한 관리를 해오고 있다.
일본의 국립공원에 있는 케이블카도 우리 지자체장들이 자주 언급하는 개발 사례이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에 새로 케이블카가 놓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국립공원은 인간의 여가 보다 자연의 보존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고 이미 오래 전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 이제 와 설악에 케이블카 설치라니, 도대체 한국의 국립공원 시계를 어느 시대로 돌려놓겠다는 것인가.
설악의 기묘한 아름다움은 분명 국내 으뜸이라 할 만하다. 또 설악의 고지대는 장백제비꽃, 노란만병초, 난장이붓꽃, 등대시호, 붉은병꽃나무, 시닥나무, 생열귀나무, 세입종덩굴 등등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 식물의 보고이다.
그런 설악의 꼭대기까지 케이블카 쇠줄을 잇겠다는 건, 절세 미인의 얼굴에 기다란 칼자국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논두렁의 잡초와 달리 고산의 꽃과 나무는 작은 충격에도 금세 바스러지는 연약한 식물들이다. 또 얼마나 많은 종들이 케이블카 때문에 멸종을 맞아야 하는가.
일찍이 고 박경리 선생은 “우리는 자연의 이자로만 세상을 살아야지 원금을 까먹으면 안된다”고 일갈하셨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좋지만 절대로 건드려선 안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국립공원도 못지키는 빈곤한 철학의 나라에서, 씻나락까지 먹어치우겠다는 나라에서 무슨 미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성원 사회부 차장대우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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