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개새끼론’이 횡행했던 적이 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나약해서 도전의식도 없고 정치ㆍ사회 참여도 안 하는 개새끼들이며 그런 20대 때문에 세상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 뒤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명망가들이 눈에 띄었다.
한 세대가 어떤 공통된 경향성을 보이는 데는 시대적ㆍ구조적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알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20대 개개인의 ‘의지’ 탓으로 문제를 돌리며 강하게 비난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청년들은 경험과 권력과 자본이 부족하다. 이들에게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과도하게 묻고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건 부당하다. 부당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2011년 말에도 눈에 띄었고, 격)월간잉여 창간을 결심하고 준비하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다(이거 혹시 20대 개새끼론을 주장했던 분들께 감사해야하는 건가?).
한동안 ‘대놓고’ 20대 개새끼론을 설파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사회에도 서로를 타자화하지 않고,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태도가 안착했다고 믿었다. 내가 너무 표면적인 것만 보고 쉽게 낙관한 것 같다. 얼마 전 말과 글을 다루는 40대의 ‘배우신 분’들 앞에서 격)월간잉여를 발행하게 된 계기와 잡지를 만들면서 만난 또래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강연이 끝난 뒤 일부 청강자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낀 얼굴로 내게 질문을 빙자한 훈계를 퍼부었고, 나 역시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배우신 분들 앞에서 한 얘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나 자신과 격)월간잉여 기고자들,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한 청년들이 삶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제 몇 십 년 단위로 삶을 계획하고, 그 계획과 목표에 따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때문에 삶을 ‘가시적인 목표를 이루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여정’이라는 인식보다 ‘순간의 집합’이라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유예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진 청년들이 늘어났다. 나 역시 그렇다. 과거처럼 기업에 몸을 맡기거나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행복을 느끼고 자존감을 획득하기 쉽지 않은 사회적 구조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유희하고 즐기는 태도, 비슷한 감성의 사람들끼리 관심을 기울이고 실없는 농담을 교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기를 나누는 일상, 세상에 큰 기대를 하지 않되 자기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정치ㆍ사회적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랬더니 어르신들은 “너무 부정적인 거 아니냐” “좀 더 생산적으로 살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물어왔다. 이미 그거에 답이 될 만한 얘기를 한 시간 넘게 떠든 것 같은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리적 저항감 때문에 질문을 빙자한 훈계를 한 것은 아닌지 의심됐다. 질문에 대해 나름 성의껏 답변했지만 코웃음 치는 걸 보며 의심은 강해졌다.
20대가 직면한 ‘빡센’ 현실과 관련된 통계나 지표를 다루는 언론 보도는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직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요즘 어르신들의 주된 여론교환의 장은 카카오톡 그룹 채팅방이라고 한다. 이런 여론 형성의 장에 익숙해지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라고 쓰고 편견이라고 읽는다)을 강화할 뿐 다른 목소리와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강한 의견을 표출하면 ‘대든다’고 생각하고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말해)’의 태도를 갖는 것도 깊이 있는 소통을 저해한다.
세상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길 바란다면 다른 의견을 교환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수정하는, 진정한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열린 태도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잘 사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좀 더 절박하게 머리를 맞댈 때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망국’을 걱정하는 어른이 취할 수 있는 기본자세이기 때문이다.
최서윤 (격)월간잉여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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