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마지막에 서면, 늘 마음 씀씀이가 한결 지극해지고 정성스러워진다. 녹음은 여전히 푸른데, 그리움은 벌써 큰 산 만큼 묵직하다. 여름 떠나 보내기가 이토록 헛헛하니, 그 끝을 부여잡고 이리도 안달이다. 그래서 딱 한번만 더 여름과 뒹굴기로 한다. 장소는 전북 장수의 덕산계곡과 토옥동계곡. 수풀 우거지고 맑은 물 철철 흘러넘치는데다, 휴가철 인파 다녀간 후라 사위는 또 어찌나 한갓진지…. 가서,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여운을 심장에 꾹꾹 눌러 각인시킨다. 이래야 1년 뒤, 여름 다시 올 그 때까지 무탈하게 버틸 수 있다. 덧붙이면, 덜 부산스러울 때 위해 여름휴가 미뤄뒀다면, 서두른다. 언제 ‘휙~’하고 꼬리를 감출지 모를 여름이다.
○ 덕산계곡
장수읍, 계남면, 번안면 경계에 장안산이 우뚝하다. 덕산계곡은 이 당당한 산을 감싸고 흐른다. 영화 ‘남부군’에서 이현상 휘하의 빨치산 500명이 1년 만에 처음으로 옷을 벗고 목욕하던 곳이 이 계곡에 있다. 이 산, 실핏줄처럼 퍼진 크고 작은 계곡 가운데 이만큼 멋지고 화려한 계곡은 없다. 들머리부터 물소리 장쾌하고, 수풀의 녹음은 풍성하다.
장수는 ‘무진장’의 땅이다. 전북 내륙 산간의 무주, 진안, 장수의 앞 글자를 따서 ‘무진장’이다. 그만큼 옛날엔 접근 힘든 오지였다는 뜻이다. 장수의 평균 해발 고도가 400~500m다. 산 깊으니 골도 깊다. 길 좋아져서 가기 편해진 요즘이지만, 덕산계곡은 여전히 깊고 깊다.
맑은 물 옆에 끼고, 잘 꾸며진 산책로 따라 계곡으로 든다. 사람들은 주로 장안산(군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아랫용소(龍沼)’까지 갔다가 되돌아나온다(편도 약 1.4kmㆍ약 20분). 일부는 아랫용소에서 임도를 따라 계곡 하류인 방화동 가족휴가촌(방화동 관리사무소)까지 간다(편도 약 5kmㆍ약 1시간). 바위마다, 돌멩이마다 솔이끼, 우산이끼 초록융단처럼 깔렸으니 사위가 촉촉하고 아늑하다. 흙길 지나고 나무다리 건너며 계곡을 탐한다. 부드러운 이끼를 만져보고, 다리 아래, 물길 한 복판에 피어난 하얀 개당귀꽃도 구경한다. 도시에서 못 해볼 것들 해보면서 느끼는 두근거림이 얼마나 사람 즐겁게 만드는 지 새삼 알게 된다.
걸을 때는 귀를 활짝 열어젖힌다. 계곡에서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바위 타고 흐르는 물소리, 계절을 찬양하는 새소리, 어깨를 다독이며 지나는 바람소리…. 무구한 자연의 소리가 먹먹한 가슴 뻥 뚫어주고, 복잡한 머릿속 말끔하게 정리해준다. 앙금 떨어내고 나면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이렇게 걷다 보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서늘함이 느껴진다. 마음이 시원해서다. 그 옛날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가 이런 거다. 영화든, TV드라마든 보면, 선비는 웃통 훌렁 벗어 젖히고 물에 풍덩 뛰어 들지 않는다. 그냥 너럭바위에 엉덩이 붙인 채, 또는 맑은 물에 발 담근 채 급할 것 없이 자연의 소리를 즐긴다. 덕산계곡에선 선비의 풍류 경험할 수 있다. 소리 참 맑고 예쁜 골짜기가 여기다.
판판한 바위가 겹겹이 나타나더니 느닷없이 트이는 시야. 그리고 펼쳐지는 너른 소(沼). ‘윗용소’다. 산책로에서 위쪽 물가까지 내려갈 수 있으니 가서 물에 발 담그고 쉬어간다. 겹겹이 늘어선 준봉들을 배경으로 층층이 떨어지는 물길이 장관이다. 이 깊은 산속에 신선의 세상이 숨겨져 있었다. 넓적한 바위에 그려진 바둑판 앞에 앉으면 정말 신선이 따로 없다.
여기서 다시 10분쯤 더 가면 ‘아랫용소’다. 웅장한 암벽 가운데로 물줄기 장쾌하게 떨어지니 무서울 만큼 멋지다. 영화 ‘남부군’에서 500명의 빨치산들이 목욕하던 곳이 여기다.
용소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아빠 용, 엄마 용, 아들 용이 이 계곡에 살았다. 아빠 용은 윗용소에 머물다가 승천했다. 엄마와 아들 용은 아랫용소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아랫용소 암벽에 글씨를 새기려고 나무를 베 소를 메우는 바람에 이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 화가 난 용이 해마다 한 사람씩 해코지를 했는데 이를 달래려고 사람들은 1년에 한번씩 여기서 제를 지냈단다. 용소 암벽에는 사람들이 새긴 글자가 지금도 선명하다.
계곡과 나란히 가는 길은 하류의 방화동 가족휴가촌까지 이어진다. 물소리 들으며 트레킹 즐기기에도 딱 좋을 길이다. 방화동 가족휴가촌은 장수군이 1988년 국내 최초로 조성해 운영 중인 가족단위 휴양지다. 산과 물을 끼고 오토캠핑장과 자연휴양림(삼림욕장)을 비롯해 물놀이장, 잔디밭, 지압로 등이 갖춰져 있다. 오토캠핑장은 지금도 인기, 바람 선선해져도 찾는 이들 많단다.
○ 토옥동계곡
토옥동계곡은 남덕유산 자락이다. 남덕유산과 삿갓봉 사이를 흘러내리는 약 7km의 계곡이다. 계북면 양악마을을 찾아가면 된다. 정갈한 양악호(저수지) 뒤쪽이 계곡 들머리다. 비 제법 내린 덕에 계곡에도, 호수에도 물이 찾다. 여름비 잔뜩 머금은 풍경이 싱싱하다.
주차장 옆, 다리 아래가 첫 번째 탁족 포인트다. 너럭바위가 있고 나무 울창해 볕 피하기도 괜찮으니 여기서 숨 고른다. 덕산계곡에 비해 규모 작지만 물소리가 주는 청량함은 결코 모자람이 없다.
다시 계곡 옆 임도를 따라 상류로 약 1km 가면 송어양식장. 그 뒤쪽이 두 번째 탁족 포인트다. 계곡 폭이 넓어지니 시야가 트이고 큰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도 있어 눈이 즐겁다. 세상과 단절된 비밀의 공간이 따로 없다. 일반인들 출입은 여기까지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깊어 이 이상 올라가는 것이 현재는 금지돼 있다. 등산로 안전시설 잘 갖춰지면 내년에나 개방될 예정이란다. 산에 오르지 않고 계곡에만 있어도 좋다. 상류에 인적 드무니 흘러내리는 물은 맑고 또 맑다. 발에 물 적시며 마음 살핀다. 휴가철, 사람들 훑고 간 자리가 이리도 한갓지다. 떠난 사람들처럼 여름도 이제 떠나려 한다. 계절의 교차가 무심한데 속절없이 발만 동동 구른다. 생각해보니, 오면서 본 장수의 들판마다 사과가 발갛게 익었다.
○ 논개의 향기에 젖다
계절의 흐름처럼 속절없이 보내야 했던 인물이 장수에 있다. 임진왜란 때 경남 진주 촉석루에서 열아홉의 나이로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논개(1574~1593)다. 산 깊고 물 맑은 장수 땅에서 그가 태어났다니 시간 나면 찾아가본다.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다.
마을 들머리 생가 터에 들러 복원된 생가를 둘러보고 그의 행적에 관해 설명하는 기념관도 구경한다. 미동 없이 당당한 눈빛을 가진 동상 앞에 서면 긴박했던 그날의 순간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순신 같은 당대의 장수가 있었고, 또 논개처럼 올곧은 여인이 있었고, 꿋꿋한 수많은 민초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그 험한 시기 잘 넘길 수 있었다.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의 실마리가 된다. 주변의 나무들이 유난히 푸르고, 생가 옆에 핀 여름꽃들이 눈물 나도록 예쁘다.
생가 뒤로 마을이 있다. 주씨 집성촌이어서 주촌마을(논개생가마을)이다. 논개도 주씨 성을 가졌다. 곱게 단장된 마을을 둘러본다. ‘졸졸~’ 흐르는 계곡 물 소리 정겹고, 돌담도 곱다. 물레방아, 디딜방아도 구경할 수 있다. 마을 꼭대기 정자에 앉으면 지붕 맞대고 들어앉은 가옥들이 바라보인다. 저녁무렵 모락모락 연기 피워내는 지붕들이 볼수록 마음 편하게 만든다. 장수읍 두산리에 논개사당(의암사)이 있으니 마음 끌리면 들러본다. 잔잔한 수면의 반영이 예쁜 의암호가 사당 앞에 있다.
산 많고 물 맑은 장수 땅에서 가는 여름도, 열아홉 논개도 가슴 깊은 곳에 곱게 묻는다.
○ 여행메모
고속도로 나면서 장수까지 가기 수월해졌다. 대전ㆍ통영고속도로, 익산ㆍ포항고속도로 차례로 타고 장수IC로 나오면 된다.
장수에서 즐길 수 있는 레저가 있다. 승마다. 장수읍 노하리에 승마체험장이 있으니 관심 있다면 들러본다. 실외승마장을 비롯해 희귀말 전시장, 방목장 등이 갖춰져 있다. 도심에서 쉽게 못 볼 것들이라 아이들도 관심 가질 만하다. 실외승마장에는 비를 막아주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 날씨 상관없이 승마 즐길 수 있다. 또 9km에 달하는 승마체험로까지 조성돼 있다. 장수 승마체험장 (063)350-2579
축제도 펼쳐진다. 29일부터 31일까지 의암호 주변 의암공원 일대 등에서 열리는 제8회 장수한우랑사과랑축제다. 장수 특산품인 한우와 사과를 이용한 다양한 체험, 시식 프로그램들이 이 기간 진행된다. 농축산물을 맛보고 성장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농업전시 홍보관과 농축산물 판매장도 운영된다. 장수군 농업기술센터 (063)350-5449
장수읍에 장수한우명품관(063-352-8088)이 있다. 매장에서 부위별로 판매하는 한우를 구매한 후 상차림비(1인3,000원)를 내고 먹는다.
자연에서 하루 숙박하겠다면 방화동 가족휴가촌(063-353-0855)이 괜찮다. 오토캠핑장, 야영장, 숲속의 집 등이 갖춰져 있고 휴양림과 계곡 등이 잘 조성돼 있다. 장수군 계남면에 있는 타코마장수촌(063-353-8200)도 가족들 묵기에 괜찮다. 장수읍과 가깝다.
장수=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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