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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세상의 여러 맛

입력
2014.08.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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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물한다는 것이 요즘 시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을 내보이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① 나는 이렇고 이런 사람입니다. ② 나의 내부가, 내 마음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책 선물의 본심일 것이나 실은 ①이나 ②, 모두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같은 의미의 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누구나 저마다 책을 선물했던 시대가 있었다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아끼는 방법의 하나로 책을 선택했던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책은 그렇다 치고 영화는 어떤가. 큰 맥락에서는 다르지 않다 싶다. 영화를 보고 좋았으면 그 영화를 꼭 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보세요’라는 말로는 안 볼 것 같은지 ‘꼭’이라는 말을 넣어야 속마음이 전달이 되니 그것 참 한번 봐야겠구나 싶을 때가 많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 거의 유일한 사치이기도 한 나는 영화 본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 또한 나의 몇 안 되는 사치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며 산다. 남에게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이상하리만치 음미할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바닥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여자와 함께 극장을 찾은 기억이 있다. 사실 영화가 좋은 것인지, 그녀가 좋은 것인지가 구분이 안 가던 꽤 오래 전 일이다. 프랑스 영화 중에 ‘미용사의 남편’이라는 영화였다. 국내에는 ‘사랑한다면 그들처럼’이라는 달콤한 제목으로 소개됐으나 그 영화를 보고 며칠 동안이나 ‘앓이’를 하다가 세 번째로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그녀와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다 보고 영화가 좋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사귀자는 말을 할 참이었다. 극장에서도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던 것 같다. 아마도 영화에 몰입하는 정도나 동감하는 정도를 살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그녀는 통 아무 감흥이 없었다는 듯 밋밋한 표정이었다.

“좋지 않았어?”라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순간 내 속은 부글부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안 좋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은근 내심 심각한 고집을 피워대면서 ‘어떻게 이 영화가 안 좋을 수 있어?’라는 심사가 번지고 있었다.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그 사람을 들여다보고 그 사람을 판정할 수 있을까 싶지만 말도 안 되는 정체불명의 젊은 피를 가지고 살 때였으니 그땐 그랬었다고 치자. 그렇게 나와 그녀는 적당한 거리에서 더 적당한 거리를 두는 사이로 밖에 발전할 그 무엇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결혼을 앞둔 그녀였는지, 결혼을 막 치른 그녀였는지 하여간 오랜만에 남의 여자가 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한 말에는 바늘 촉 같은 따끔한 것이 지나가고 있었으니 그 말은 이랬다. “그땐 몰랐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됐어요. 그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 그땐 내가 많이 어렸나 봐요.”

비극적인 사랑에 관한 영화였고,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충동적인 감정으로 사랑을 완성하려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여서 보편적인 동감을 끌어내기엔 불편하면서도 무리가 있을 법한 영화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영화의 정서를 인간적이라고 받아들였으며, 정서적인 강요로 한 여자를 시험했다가 뒤늦게 한 대를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 됐다.

나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두렵다. 오래 산 것에 비례해 낯이 두꺼워졌다고는 해도 나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속을 여미게 된다. 그럴수록 나와 같은 사람을 찾겠다고 여러 시험지를 들이대고 눈치를 살피는 게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기준과 중심들을 꺼내 벌여 놓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이해하는지 이해 못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의 박자를 가지고 살며, 혼자만의 시력으로 살아간다. 결국 우리는 그 모두를 겪겠다고 ‘인간 소믈리에’의 자격으로 태어난 것.

남의 ‘다름’을 한낱 ‘이상함’으로 보겠다는 포즈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세상의 여러 맛이 차려진 특급 식당에 입장할 권리를 잃는다.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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