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참사’와 ‘교통 사고’
현격한 시각 차 메울 수 없다면
여야, 양쪽 잇는 다리라도 돼야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교착상태다. 줄다리기 끝에 어렵게 마련한 여야 원내대표 합의를 야당이 팽개친 것이 직접적 계기다. 발끈한 여당은 야당의 재협상 요구에 아예 응하지 않을 태세다. 그러나 여야 모두 원내대표에 전권을 사실상 위임한 상태이고, 국회의 장기 공전에 따른 정치적 부담에서 어느 쪽도 자유롭지 못하다. 오래지 않아 재협상을 통해 새로운 타협안을 만들어 내리란 기대가 식지 않는 이유다.
궁하면 통한다지만, 현실정치만큼 ‘궁즉통(窮卽通)’이 자주 작동하는 영역도 드물다. 애초에 사회적 갈등과 대결을 떠안아 풀어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고, 바로 그런 고도의 협상 기술을 발휘하라고 주권자인 국민이 입법권을 맡겨 주었다. 연말의 예산국회에서 흔히 보듯, 당장은 위태로워 보여도 어떻게든 타협안을 만들어 고비를 넘어온 게 한국 의회정치의 역사다.
그런 막바지 타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실은 정치인끼리의 동류의식과 쇼맨십이다. 국민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는 각각의 지지자들이 부여한 역할에 충실하다가도 무대 뒤에서는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기를 칭찬해 주었던 것이 현실정치의 실상이었다. 그런 행태가 지나쳐 ‘사쿠라’나 ‘2중대’ 논란이 야권에서 일기도 했지만, 적당한 쇼맨십은 ‘정통야당’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행태는 정치 자유주의(이상주의) 견지에서는 척결해야 할 1순위 구태일 수 있다. 실제로 정치 자유주의에 경도된 열린우리당의 출범 이후 한동안 타협의 정치는 실종되기도 했다. 그 이후 정치 선배들의 그런 행태가 단순한 막후 짝짜꿍이 아니라 나름대로 가치와 효용이 있다는 인식이 싹텄다. 그런 행태가 정치는 물론이고 세상살이에서 빠뜨릴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포용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이었다. 오늘 나란히 취임 100일을 맞은 이완구 새누리당ㆍ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그런 전통의 재발견 측면에서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런 두 사람이 합심해 빚은 야심작이 깨어져버렸으니 그 속상함과 아쉬움이 오죽할까 싶다.
합의 파기 당론을 앞장서서 이끈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선과 총선ㆍ재보선 선거의 잇따른 패배에 책임이 크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김한길ㆍ안철수 공동대표의 사퇴로 빚어진 온건파의 동요를 틈탄 당내 강경파의 반격이 성공한 셈이다. 선거에 질 때마다 잇따른 ‘당 체질 개혁’ ‘투쟁정당 탈피’ 다짐의 실현이 요원해졌다. 거세게 밀려든 책임론에 떠밀려 침묵하거나 온건파의 체질개혁 주장에 공감하는 듯하던 모습과는 너무 딴판이다.
더욱이 이들이 여야합의 파기의 당위성을 부각하기 위한 이유로서 들고나선 ‘유가족의 요구’와 ‘국민의 뜻’은 야당의 존재 의미를 의심스럽게 한다.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을 가슴에 묻은 유가족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그들의 요구를 얼마나 어떻게 입법에 반영할 것이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별개다. 시민단체의 영향력에 끌려 야당 스스로 시민단체 연합체나 대표단체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고서는 세월호 특별법이 이해당사자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의 뜻’ 또한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세월호 참사의 전모를 밝혀 재발 방지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총론에 공감하지 않을 국민은 드물 것이다. 반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중점적 조사 방법이나 대상, 절차 등 구체적 문제를 두고는 다양한 의견으로 갈려있다. 당장 세월호 참사의 속성에 대한 인식의 스펙트럼도 ‘교통사고’와 ‘행정참사’라는 양극단 사이의 넓은 공간에 층층이 펼쳐져 있다. 여당 내의 ‘교통사고’ 인식이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고, 국민 다수가 ‘행정참사’ 인식에 젖어있다고 여긴다면 섣부른 착각이다. 행정 말단인 현장 출동 해경 경비정의 중과실 여부를 법원이 심리하기 시작한 단계다.
여든 야든 양극단의 인식 어느 한쪽을 무조건 편들어서는 안 된다. 절벽 사이의 넓고 깊은 공간을 메울 수 없다면 다리를 놓아 오가게 할 수는 있다. 여야 스스로 양극단에서 벗어나 절벽 위를 가로지른 다리가 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런 각오만 있다면, 세부사항 일부를 손질한 새로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까닭이 없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