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72+111=627.
최근 20일간 기획재정부가 생산한 정책 자료 페이지 수다. 어지간한 단행본 두 권 분량에 달한다. 원래 자료 양이 많기로 유명한 기재부지만, 경제정책방향(7월 24일) 세법개정(8월 6일) 서비스업 육성 대책(12일)에 이르기까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취임 이후 밀린 방학숙제 하듯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다 아는 공무원도 없을 테고, 네다섯 번 읽은 나도 전부 파악하지 못한다.
해당 공무원들은 죽을 맛이다. 최 부총리가 첫 확대간부회의에서 호기롭게 직원들에게 휴가를 독려했지만 정작 휴가를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자료 만들다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공무원도 있다고 한다. 그들의 노고에 우선 박수를 보낸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긴 627페이지를 150자 정도로 요약하면 이렇다. ‘전(全)방위 경기부양을 위해 돈(41조원)은 있는 대로 풀기로 하고, 규제 역시 왕창 푼다. 10년 넘게 사회적 갈등이란 벽에 갇힌 서비스산업은 정면 돌파한다. 비정규직을 챙기고, 기업의 이익이 가계로 흘러가도록 참신한 가계소득증대세제 3종 세트를 곁들인다.’ 성장론자의 원칙에 분배까지 살짝 가미한 셈이다.
그러나 구구한 부연 설명과 복잡한 셈법을 살펴보면 과연 정책의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스럽고 헷갈리는 대목이 여럿 눈에 띈다. 폐기되거나 미뤄진 정책들이 버젓이 되살아나는 놀라운 경험도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걸 담으려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양만 잔뜩 늘어난 꼴이다.
배당소득에 대한 세제 혜택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부자나 재벌에게 유리하고, 근로소득증대세제는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겐 대기업 직원들의 배만 불리는 그들만의 잔치로 비친다. 기업소득환류세제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핵심인 과세유발구간을 확정 짓지 못해 기업들의 세 부담이 1조니, 0원이니 갈피를 못 잡은 채 기업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그건 아니라고 누차 설명해야 하는 군색한 처지라 변명이 늘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 영리화, 복합리조트 건설 지원 등 과제 수만 135개인 서비스산업 육성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추경호 버전’의 부활이라 불린다. 올 초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때 발표하려다 대통령의 지시로 잘려나간 대책들을 다시 모았다는 얘기다. 당초 3개년 계획은 추경호(현 국무조정실장) 당시 기재부 1차관이 2시간에 걸쳐 사전 설명을 했던 300페이지짜리 100대 과제가 원안이다.
게다가 복잡한 이해관계와 사회적 논쟁으로 얽힌 서비스산업은 ‘무엇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풀지가 더 중요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 젊은 층의 일자리 문제”라는 구호는 감성적인 호소는 될지언정, 견고하고 다양한 반대 논리를 깨기엔 약해 보인다. 세상 일에 무심한 의료계 지인들은 벌써 의료 영리화를 걱정하고, 여당 국회의원 출신 도지사는 추가 리조트 건립에 반대하고 있다. 단순히 이념 문제로 몰아세울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도 아직 최 부총리를 믿는다. “비정규직 문제만큼은 꼭 해결하겠다”는 말에 진심이 느껴지고, “의견이 다르다면 열띤 논쟁을 주저하지 않겠다”는 태도와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는 추진력에 공감한다. 여당의 재보선 승리, 주식과 부동산 가격 상승 등 이른바 최경환 효과 역시, 그런 기대 심리가 합쳐진 결과일 것이다. 그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분위기는 띄웠으니 이제 정책의 양은 좀 줄이고 보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에 치중했으면 한다. 최 부총리가 “감히 나랑 비교하느냐”고 했던 아베노믹스조차 일본 국민에게 숫자 ‘2’(2년 내 물가상승률 2%, 2020년까지 실질성장률 2%, 임금 인상 2% 등)로 기억된다고 하지 않는가. 최경환 경제팀의 정책에는 그런 간단명료함이 없다.
을밀대라는 냉면집이 있다. ‘양마니’(양 많이)라고 하면 같은 값에 면을 더 얹어준다. 냉면이야 양이 많으면 배라도 부르지, 정책은 양이 많으면 머리만 아프다. 사람들이 알아서 먼저 “양 많이”라고 외치도록 정책에 맛을 내기 바란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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