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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내면화된 사회...문제도 민주주의 해답도 민주주의다

입력
2014.08.1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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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일병 폭력 주도한 이 병장

단식농성 세월호 유가족을 노숙자로 비유한 정치인

폭력의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희생자의 고통에 둔감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도 폭력적 댓글로 분노 표출

누구나 폭력의 주체 될 수 있어

사회의 민주적 역량이 줄어들면 폭력은 검은 안개처럼 스며들어

우리 곁에 일상으로 자리잡아

이메일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이병장과 병사들’의 사진이다. 이런 사진을 주고받는다는 게 옳은 일일 수 없고, 법에 저촉될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그 면면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의 한복판을 조금 비껴서 문제의 이병장이 있고, 다른 일곱 병사가 그를 둘러싼 구도다. 얼굴이 모자이크로 가려진 세 사람은 아마도 윤일병의 참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들일 듯싶다.

선입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병장에게는 완강하고 자신만만한 품새가 있고, 사진 전체에는 화통한 분위기에 어떤 열기 같은 것이 떠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통같은 단결을 뽐내거나 뽐내는 척했을 것이며, 자신들이 사나이, 그것도 ‘진짜 사나이’라고 믿거나 믿는 척했을 것이다. 윤일병이 밤낮으로 폭행을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고문을 받은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는데, 저마다 방조하거나 방관할 뿐이었던 저간의 사정이 이로써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참병이건 신참병이건 지혜롭고 용감한 병사가 하나만 있었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달라졌겠지만 달라진 상황 역시 폭력의 표적이 바뀔 뿐이었지, 진정으로 비극에서 멀리 벗어났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벌써 심각해진 폭력이 더욱 거대한 폭력으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군대문화에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에서, 폭력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국군양주병원장으로 군대인권교육을 했다는 어느 대령의 발언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세월호의 참사도 윤일병의 죽음도 하나의 말썽거리일 뿐이었다. 인권에 관해서라면,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그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조차도 그의 말에서는 발견할 수 없으니, 사람인 병사들은 “빌미를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관리해야 할 사건이나 물건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이병장의 온갖 행업은 몸서리치는 폭력이 아니라 “소나기를 피해 갈” 줄 모르는 서투름에 불과했다. 그는 월남전과 관련하여 “잔혹행위라도 해서 살아남는 게 땡”이며 그것을 윤리적으로 비판하기 어렵다고 주장함으로써 폭력 근절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데 더하여 폭력의 필요성까지 암시하였다. 이는 폭력이 벌써 한 조직과 한 사회의 의식 속에 내면화하였음을 그 자신이 인정한 것이나 같고, 그 조직과 사회의 관리 원칙을 폭력에서 찾은 것이나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령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들으며, ‘말은 옳은 말인데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사람이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사건을 가능한 한 감추거나 축소하려고 했던 책임자들은 그 대령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세월호 희생자의 학부모를 노숙자로 비유하는 의원이나, 단식 농성하는 학부모들이 왜 병원에 실려 가지 않느냐고 이상한 ‘염려’를 하는 의원이 저 이병장과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의원들이야 화를 내겠지만, 희생자들의 고통에 둔감하다는 점에서는 그 의원들과 이병장과 저 대령 사이에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윤일병의 참사를 알리는 기사의 댓글들도 폭력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모두가 착한 사람들일 ‘댓글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잠언이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가 이병장의 행악을 그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기를 바라며 착한 사람들이 저 훌륭한 잠언의 반대편에 서려 할 때, 폭력의 주체가 누구라고 말해야 할까. 내면화는 일상화다. 폭력은 이렇게 한 세계의 내면이 되고 일상이 되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압축 저장된 폭력은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민주역량이 줄어들거나 맥을 잃으면, 검은 안개의 무리가 되어 사람들을 더욱 험악하게 습격한다. 앞에도 폭력이고 뒤에도 폭력이다. 땅에도 폭력이고 하늘에도 폭력이다. 윤일병이 절해고도에 갇혀 있었던 것은 의무대가 본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도 아니고, 생활관의 입구가 요상해서도 아니고, 무한 폭력에 둘러싸여 모든 시도가 가망 없었기 때문이다. 입구가 폭력이고 출구가 폭력이며, 하소연이 다시 폭력이 되어 돌아오니 그 폭력을 무어라고 이름 지을 수조차 없다.

앙리 미쇼는 ‘거대전투’(1927)라는 시를 썼다. 거대하고 끝없는 폭력에 관한 서사인데, 그 폭력행위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일 수 없어, 새로운 낱말들을 만들어내었다. 이를테면 ‘거칠게 문지른다’는 뜻의 racler와 비슷한 낱말 raguer를 만들었다. 그것을 ‘쭈물떡하다’로 번역해도 될까. ‘가루’라는 뜻의 poudre에 가까운 pudre를 넣어 espudriner라는 낱말을 만들었다. ‘뽀사불다’라는 번역어가 가능할까. 아무튼 우리도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가며 이 시 ‘거대전투’를 가능한 한 그럴 듯하게 번역해보자.

놈은 녀석을 낚아울러대 땅바닥에 등짝빡치고,

놈은 녀석을 쭈물떡하고 꼬르락까지 개상직이고,

놈은 녀석을 쪽팍뭉게고 아갈치고 녀석의 귀썀 으르때리고

놈은 녀석을 쌔리박고쳐 폭시가마솥하고,

하는 일마다 찍에다 갈아대고 갈에다 찍어댄다.

마침내 놈은 녀석을 껍질창시뺀다.

상대 녀석은 우면좌면, 뽀사지고, 흩어지고, 비틀꼬지고, 스러진다.

이러다 녀석은 끝장 보겠다

녀석은 저를 추스르고 쪼갈맞추고... 그러나 헛일이다.

그리도 내내 굴러가던 굴렁쇠가 넘어진다.

아브라! 아브라! 아브라!

발이 무너졌다!

팔이 부러졌다!

피가 흘렀다!

뒤져보고, 뒤져보고, 뒤져보라

녀석의 배 그 냄비에 거대 비밀이 하나 있단다

손수건에 파묻혀 울고 있는 주변의 할망구들아,

질겁하고, 질겁하고, 질겁해서

그대들을 바라본다

또한 찾기도 한다, 우리들은, 저 ‘거대 비밀’을.

가해자는 측량할 길 없는, 그래서 이름 지을 수 없는 폭력을 모두 동원하여 희생자의 생명을 위협한다. ‘놈’과 ‘녀석’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 둘은 모두 폭력에 사로잡혀 있으며, 한쪽이 능동적이고 다른 쪽이 수동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희생자가 적극적으로 하는 일은 “아브라! 아브라! 아브라!” 소리 지르는 것뿐이다. 신이나 구원해 줄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혼미하여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일까. 구원의 요청이건 필사적인 비명이건 효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윤일병에게는 이 비명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마음이 약해 울며 무력하게 주변을 떠도는 “할망구들”밖에 없다. 그러나 그 무력한 슬픔을 겁에 질린 마음으로라도 지켜보는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며, 시인이 또한 그 “할망구들”에게 희생자의 내장을 뒤져 “거대 비밀”을 찾아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폭력으로 파괴된 내장 속에 무슨 비밀이, 그것도 거대하게, 남아 있을까. 무슨 비밀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구경꾼들의 희망만 남아서 모호하게 떠도는 것이 아닐까.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아 있다는 희망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질겁하며 관망하던 사람들도, 곧 “우리들”도, 마음 약한 노파들을 뒤따라 그 비밀을 찾겠다고 다짐하며, 비밀은 마침내 진정한 “거대 비밀”, 곧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된다.(마지막 시구의 “거대 비밀”에 작은 인용부를 붙인 것은 그것이 원문에서 대문자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저 파괴된 내장에 거대한 비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민주적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민감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우리들”의 마음이 된다.

문제는 또 다시 민주주의다. 우리 시대의 거대 폭력에는 민생이라는 말로 민주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모든 주장과 행티도 포함된다. 포함될 뿐만 아니라 첫 자리를 차지한다. 민주와 민생을 따로 떼어 놓으려는 시도는 “맞고 살래, 굶어 죽을래?”라고 묻는 것과 같고, 노상강도가 육혈포를 들이대고 “돈이 중하냐, 생명이 중하냐?”고 묻는 것과 그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 윤일병은 굶어 죽기 전에 맞아 죽었으며, 다른 여러 병사들은 맞아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찾아야 할 비밀도, 찾게 될 비밀도 민주주의다. 우리가 저 시체들을 끌어안고 비밀 찾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희망하지 않는 셈이 된다. 희망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희망 자체가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높고 낮은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묻고 말한다. 병사들을 관리하기가 어려운가. 그렇다면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생각하라. 낮에만 생각하지 말고 밤에도 생각하라. 생각하기 어려우면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라. 그렇게라도 하다 보면 마침내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문제도 민주주의고 해답도 민주주의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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