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는 11일 의료 윤리위원회를 소집해 아직 안전성 검증을 받지 못한 시험 단계의 치료제를 사용하도록 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지맵(Zmapp) 등 시험단계 치료제를 본격적으로 공급하는 문제와 투여의 우선 순위 등을 둘러싼 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미국인 에볼라 감염자에게 투여해 효과를 보는 것으로 알려진 지맵은 생산량이 극히 제한적이고 개발사인 미국의 맵바이오는 전면 생산에 착수한다고 해도 에볼라가 창궐하는 서아프리카 지역에 공급하려면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물량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도 당면 과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외국인들만 지맵의 혜택을 받을 뿐 정작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서아프리카 의료진들은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한다며 인종차별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11일 소집되는 WHO 윤리위원회는 안전성이 아직 확보되지 않은 시험단계의 치료제를 사용하는 것이 윤리적인지, 만일 사용하게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과 조건으로 이 시험용 치료제를 투여하도록 할지를 검토한다. 또 아직 치료제나 백신이 없는 상황에서 시험 단계의 치료제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판단할 경우 공급량이 제한된 이 치료제를 어떤 기준에 따라 분배할지에 대한 기준도 협의한다.
WHO는 일부 구호기관들에게서 에볼라 바이러스의 위협이 심각해지고 있는데도 공세적인 대응을 취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라이베리아에 파견된 유럽연합(EU) 집행위 인도지원부의 보건 전문가는 블룸버그와 전화 인터뷰에서 “WHO는 기술적 조언 이상의 것을 할 큰 책무가 있다”고 꼬집었다. 에볼라 영향권에 700명의 인력을 두고 있는 국경없는 의사회는 지난 몇주 동안 대규모 의학ㆍ역학ㆍ공중보건적 대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경고해왔다면서 WHO의 늑장 대응을 비난했다.
이번 WHO 윤리위원회 소집에 대해 미국 뉴욕주립대 랭건의학센터 아서 캐플런 의료윤리부장은 “비상시에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을 어떻게 분배할지를 놓고 아주 늦기는 했지만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평가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캐플런 부장은 시험 단계의 치료제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어떤 여건에서 사용하게 할 지가 차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례로 이 치료제의 효과와 부작용 가능성 등을 잘 알고 동의하는 사람에게만 투여할지, 서아프리카 기니의 극빈층 주민에게 이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현지 정부 당국이 이를 허락할지 등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캐플런 부장은 WHO는 치료제의 사용을 확대할 수 있도록 권고만 할 수 있을 뿐, 제약사들에게 치료에 관련해 부담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한계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약사는 치료제의 냉장보관과 수송, 적절한 취급, 환자 사망에 따른 책임 전가, 문맹자와 빈민에 임상실험 단계의 의약품을 실험했다는 비난 등을 우려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와 라이베리아 정부당국자들은 미국인 의사와 간호사가 지맵을 투여 받고 상태가 호전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치료제 공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FDA측에서 소량만 가능한 상태라는 답변을 얻었을 뿐이다. AP통신에 따르면 FDA 대변인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공급 요청과 관련해 “사실상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이 없다”고 말했다.
지맵을 만든 맵바이오에 따르면 가용 물량은 거의 소진된 상태다. 회사측은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관계 정부 기관들과 협력하고 있지만 본격 생산에 착수한다고 해도 서아프리카 의료진에 전달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NYU 랭건 의학센터의 캐플런 부장은 공급 물량이 이처럼 제한될 경우 오래 전 감염된 사람과 최근에 감염된 사람, 어린이와 노인 감염자들을 놓고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의 분자생물학자 에리카 올먼 새파이어는 서아프리카 현지에서 활동하는 내ㆍ외국인 구호활동가들이 우선 순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은 스스로를 큰 위험에 빠뜨리면서 타인을 돌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블룸버그 통신에 보낸 이메일에서 치료제가 효과가 있다면 이들은 다른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복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면역이 생겼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장래에도 훨씬 더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타운 대학 펠레그리노 임상의료윤리학 센터의 케빈 도노번 소장은 아프리카 의사들이 동일한 치료 기회를 가져야 한다면서 이들이 자금과 인력이 극도로 열악한 조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아프리카 구호활동가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이런 여건 속에 자신을 던진 현지 의사와 간호사들은 더욱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에이즈 연구센터의 살림 압둘 카림 박사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지맵이 서아프리카에서 사용됐더라도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그 경우 “지역신문은 1면에 아프리카인이 미국 제약회사의 실험쥐로 이용됐다는 제목을 뽑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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