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솔 교사도 범죄 내용 모른 채 "보고 싶은 재판 골라서 들어가라"
흉악범 재판 아무런 제지 없이 방청 인솔자 없는 경우도 다반사
재판 공개 원칙 존중돼야 하지만 청소년에 방청 가이드라인 필요
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 수갑을 찬 채 포승줄에 묶인 피고인이 들어섰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롤모델’이라고 일기를 써 충격을 줬던 강남 20대 여성살인범 이모(21)씨였다. 방청석에 있던 중학생 5명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강도살인’이라는 피고인의 죄명을 알게 된 한 학생은 옆 친구에게 오른손을 말아 쥐고 흉기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소곤거렸다. 공교롭게도 학생들의 둘러 앉은 자리 바로 곁에는 피고인이 휘두른 과도에 찔려 사망한 피해자의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이씨의 재판에서는 검사의 피의자 심문을 통해, 이씨가 조사 과정에서 “더 못 죽인 게 한이다” “7명을 죽인다. 살해순위는 애XX들, 계집X, 노인,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 순이다”라고 진술한 내용들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노출됐다. 이씨는 이날 “TV나 인터넷 등을 보고 (범죄내용을 담은) 일기를 쓰면서 분노가 풀렸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당황한 인솔자가 아이들을 일으켜 법정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뒤늦게 청소년들에게 끼칠 악영향이 우려된 것이다.
잔혹한 살인 사건이나 성폭력 사건 등 일부 강력범 재판이 아무런 제지 없이 청소년 방청객들에게 노출돼 논란이 일고 있다. 헌법상 재판공개의 원칙 때문에 방청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절한 방청을 유도하는 관리자와 가이드라인조차 없이 청소년 방청이 방치되고 있다.
10일 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고법과 중앙지법에는 모두 5,900여명의 초ㆍ중ㆍ고 학생들이 재판 방청을 비롯한 공식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일부 견학은 법관이 동행하지만, 견학 관리를 맡은 법원 직원은 2~3명에 불과하다. 학생을 인솔하는 학부모나 교사들은 사전 지식이 없어 부적절한 내용임을 알지 못한 채 재판장에 들어선다.
수십 명 단위의 견학생들이 한 법정에 들어갈 수가 없어 학생들끼리 인솔자 없이 방청하는 경우도 많다. 한 법원 직원은 “평일 오전 법원의 재판일정 게시판 앞에서 인솔 교사들이 학생들을 향해 ‘가보고 싶은 재판을 골라 짝을 지어 들어가라’는 것은 아주 익숙한 광경”이라고 말했다.
법원에 견학신청을 않고 학생들끼리 임의로 찾는 경우는 집계되지도 않는다. 이씨의 재판이 있던 날에는 또 다른 중학생 또래 학생들 서너 명이 법원 직원들에게 “재판 구경하러 왔는데 재판 하는 곳 없냐”고 물으며 417호 대법정 부근을 헤매기도 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선 경범죄부터 감금치상, 강도상해 등 강력범죄까지 70여건의 형사재판이 진행됐다. 소년범 재판, 가정법원 재판, 일부 성폭력 재판 등은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그 외 모든 재판은 헌법 상 피고인의 권리 등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하는 게 원칙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다소 민감한 내용이 포함된 형사사건 재판에 찾아온 청소년들에게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타일러 내보낸 적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견학생들에게 어떤 법정은 되고 어떤 법정은 못 들어 온다고 하는 건 법의 취지나 방향과 맞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신진희 성폭력 피해자 전담 변호사는 “방학을 맞아서 직업체험 등을 이유로 청소년들이 법정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7일에도 강도강간 사건 관련 변론 중 사건과 무관한 고등학생들이 있어서 당황했다”며 “재판 내용이 비교육적일 수도 있고,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재판부가 제한적으로나마 직권을 행사하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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