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는 책임이 따른다. 수원에서 낙선한 손학규는 곧바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다”는 그의 말은, 그 약속을 원치 않았던 유권자가 그에게 했어야 할 위로이다. 국민은 정치인을 이용하여 제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데, 손학규의 패배는 적어도 그 지역민들은 저녁을 포기하더라도 다른 것을 더 강하게 욕망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이상으로써 아름다우나 현실에서 거부당했고, 그것은 그의 정치인생과 닮아있다. 하지만 제 이름에 깃든 기득권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국민들이 훗날 그를 다시 불러들일 여지가 만들어졌다.
이런 절묘한 반전을 따라 가면, 자연스레 안철수에게 도착한다. 선거 패배 후, 안철수는 공동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걸로 제 몫의 책임을 졌다.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 내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열렬한 지지의 근거는 백신 프로그램으로 깨끗한 컴퓨터를 만들었듯이, 신뢰를 잃은 한국 정치계도 그렇게 해주리란 믿음이었다. 자신보다 지지율이 낮은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하자, 그 믿음은 곧 현실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무엇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중도 포기를 되풀이했다. 그가 내세우는 말은 말로써 아름다우나 내용이 없었고, 대부분 하나마나 한 말들이었기에 현실에서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역사의 전면에 '깜짝 스타'마냥 등장한 모든 이들은 기대에 걸맞은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면 곧바로 처참하게 추락했다. 그렇다면 안철수도 추락한 메시아 가운데 하나일 뿐일까?
선거의 목적은 승리이다. 당대표로서 안철수는 이기기 위해 (전략)공천을 했고, 거기에는 늘 잡음이 따르기 마련이니 너무 야멸차게 그를 몰아세울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와 김한길 전 대표가 이끄는 새정치연합의 색깔이었다. 야당인데 여당처럼 생각하고 판단했다. 민심난독증과 불통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불통은 반대편의 논리를 알면서도 철저히 자기편의 이익에 충실하다면, 자기편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난독증은 무능하기 딱 좋다. 그래도 “안 대표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던 세력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한 공이 있다”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평가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안철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안철수는 버림으로써 얻었다. 손학규가 그러했듯이, 안철수도 높은 지지율과 당선가능성을 버렸을 때, 국민들은 '안철수 현상'이란 큰 선물로 돌려주었다. 그래서 그가 제 이익을 적극적으로 챙기려 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그는 더 많이 잃을 수 밖에 없었고, 국민들은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을 분리시켰다. 이념과 지역주의 정치에서 벗어난 ‘새롭고 유능한 진보’가 안철수 현상의 핵심요소 가운데 하나라면, 그것을 현실화시킨 박원순을 안철수 현상의 적임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사실 2011년 서울 시장선거에서도 박원순이 안철수와 '안철수 현상'의 신선한 파급력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잘 활용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은 안철수의 영향력을 완벽하게 자신에게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박원순과 문재인이 그를 조연으로 사용했다면, 김한길은 안철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 숨은 형국이다. 이번 선거 패배의 책임논란에서 김한길의 이름이 별로 거론되지 않으니, 그도 그 나름대로 안철수를 잘 사용한 듯하다.
이렇듯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의 대리자로서 누군가에게 쓰일 때, 제 가치가 잘 발휘되었다. 마치 주연배우 곁에서 영화를 빛내는 훌륭한 조연배우와 같다. ‘예능계의 2인자’ 박명수는 ‘1인자’ 유재석 곁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나, 단독 진행을 맡으면 대부분 실패했다. 유재석이 박명수를 잘 활용하여 웃음과 재미를 만들어냈을 때, 박명수는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안철수는 박명수 쪽에 가깝다. 안철수는 역량에 비해 너무 과도한 기대를 받았고, 더 이상은 '안철수 현상'의 유일한 적자도 아니다. 따라서 안철수는 자신을 잘 활용하는 인물의 곁에 서는 ‘창조적 버림’을 결심한다면, 국민들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것이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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