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과 경제학의 논의 주제 중 하나인 ‘대리인-주인이론(principal-agent theory)’ 은 대리인이 주인화 되어 가는 과정을 문제 삼는다. 주인은 자신보다 지식과 정보가 많은 대리인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 줄 것을 부탁한다. 대리인은 처음에는 주인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주인의 뜻을 자신의 편의에 맞춰 왜곡한다. 어느 순간 대리인은 자신의 이익을 주인의 이익에 앞서 고려하게 되고, 사실상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7·30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여당과 야당 모두 선거 결과를 분석하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추구하겠다고 나섰다. 여당은 "국민의 뜻은 국가를 혁신하고 민생경제를 활성화해 삶의 질을 높여달라는 데 있다"고 선거결과에 의미를 부여했고, 야당은 “계파갈등, 공천파동 등으로 제대로 된 야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국민이 심판했다”며 선거 패인을 분석했다. 정치영역에서 국민(주인)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는 여야는 나름대로 ‘국민의 뜻’을 해석하고 있다.
‘국민의 뜻은’, ‘국민이 심판했다’ 등의 언급은 ‘나는 국민의 대리인이고 주인의 뜻이 이러이러하니 그 점을 충실하게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야의 발언은 국민(주인)의 뜻을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국민은 민생 법안이나 계파갈등 해소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다 말한 적이 없다. 여야는 국민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뜻’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국민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헌법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잡을 수는 있다. 헌법은 국민의 대리인인 여야가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정해놓았다. 헌법 제3장은 ‘국회’에 관한 내용으로, 그 출발점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제40조)’는 조항이다. 예산안 심의확정권(제54조), 국정감사권(제61조 제1항), 국무총리 등 해임건의권(제63조 제1항) 등은 위 입법권에 뒤이어 나온다.
물론 입법권에 대한 조항(제40조)이 다른 조항에 앞서 규정되어 있다고 하여, 그 효력이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입법부의 문헌적 의미가 ‘법을 제정하는 부서’라는 점 그리고 입헌자들이 국회의 입법권을 다른 권한에 앞서 규정한 점들을 감안할 때, 여야가 속한 국회의 기본적 역할이 ‘입법’임을 부정할 수 없다. 국민(주인)이 국회(대리인)에 기대하는 것은 바로 ‘제대로 된 입법 활동’이고, 이것이 바로 ‘국민의 뜻’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최근 국회의 행태는 국민의 뜻인 입법과는 거리가 멀다. 국회는 지난 5월 이후 석 달 째 단 1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의 수는 360여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분의1이 적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안’은 특별검사 추천권 등을 둘러싼 공방으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고,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일명 김영란법),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일명 유병언법) 등의 처리도 요원한 상태다.
국회의 입법 방기는 비단 새로 발의된 법 제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하였으나 국회의 입법 활동 해태로 개정되지 못한 법률 및 시행령은 30여개가 넘는다. ‘미네르바법’으로 알려진 전기통신기본법은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나고 3년이 넘었으나 대체 입법은 소식이 없다. 헌재는 1992년 4월 국가보안법 19조 중 찬양 고무나 불고지죄 부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지만, 국회는 20년 이상 위 법 조항을 방치하고 있다.
여야에 대한 국민의 차기 심판은 2016년 4월 총선이다. 1년 9개월이나 남았다고 해서 국민(주인)의 뜻을 왜곡해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 특별법을 방치하거나 당내 쇄신에만 몰두하는 행동은 국민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제대로 된 입법 활동이 대리인이 해야 할 일이고, 바로 국민이 여야에 원하는 것이다.
허윤 법무법인 예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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