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포천은 거대한 야외 갤러리다. 이 땅 구석구석에 눈이 놀랄 대자연의 '작품'들 수두룩해서다. 용암과 물과 바람이 조각했다. 여기에 영겁의 시간까지 오롯이 스미니 볼수록 기경(奇景)이다. 비 오면 더 멋지다. 쳇바퀴 돌 듯 뻔한 하루가 지겹고 보이는 것들마다 감흥 없을 때 이 넓은 갤러리로 훌쩍 떠난다. 가서, 자연 속에 꼭꼭 숨어있는 작품들 찾아본다. 휴가철 맞아 사람들이 인파에 치일 때, 홀로 자연과 뒹구니, 이것도 신선놀음이다. 더위에도 눈이 즐겁고 기분전환까지 된다.
○ 한탄강 최고 비경 ‘비둘기낭’과 ‘구라이골’
한탄강이 포천을 가로지른다. 큰 여울 많아서 붙은 이름인데, 분단의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니 ‘한탄’을 이와 관련지어 애써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오래전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 오리산에서 용암이 분출했다. 이것이 흐르다 식은 대지에 물길 생기고 침식작용이 일어났다. 바람까지 힘을 보태 용암대지를 깎았다. 현무암 협곡 하천, 한탄강은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나라 내륙에서는 참 보기 드문 지형이다.
물길 따라 가면 눈이 놀랄 풍경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땅덩어리를 칼로 싹둑 썰어낸 것 같은 깎아지른 절리(암석의 수직ㆍ수평 균열)가 있고, 축구공처럼 표면이 반들반들하고 부드러운 현무암 바위들도 있다. 시원한 물길 가장자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용(龍)을 닮은 바위도 나타난다. 큰 길 옆이지만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원시의 계곡도 있다.
포천시가 이 가운데 가장 멋지고 가치 높은 여덟 곳을 선정해 ‘한탄강 팔경’이라 이름 붙였다. 천연기념물이 세 곳, 명승도 두 곳이나 포함됐다. 이러니 자연의 조각품들 구경하려면 이곳들 찾아 가면 된다. 특히 놓치지 말아야할 곳들 짚어보면 이렇다.
비둘기낭(6경)은 무조건 본다. 한탄강 팔경의 백미다. 생긴 게 꼭 새둥지 닮은 현무암 협곡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 비둘기들이 정말 많았단다. ‘낭’은 낭떠러지의 줄임말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 그래서 비둘기낭이다. 영북면 대회산리 한탄강 지류에 숨어있다.
울창한 나무 아래로 느닷없이 펼쳐지는 놀라운 풍경. 거북 등껍질처럼 생긴, 수십미터 높이의 주상절리, 이 안에 폭 안긴, 눈부신 에메랄드 빛 소(沼)와 웅장한 협곡…. 큰 비 내린 후에는 이 투명한 소 위로 장쾌한 폭포까지 떨어진다. 지난 2009년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천명공주(박예진 분)가 덕만공주(이요원 분)를 대신해 독화살 맞고 최후 맞은 비운의 장소도, 2010년 방영된 드라마 ‘추노’에서 태하(오지호 분)가 부상당한 혜원(이다혜 분)을 업고 와 치료하던 그 비밀스런 공간도 다 여기다.
비둘기낭은 원래 사진 촬영 좋아하고, 천연한 자연 탐하던 사람들이 은밀하게 찾던 곳이다. 언제부터인지 입소문 타더니 지난 2012년에 천연기념물이 됐다. 이전까지 풀숲 헤치고 힘들게 내려가야 했던 진입로는 나무 계단으로 잘 정비 돼 하이힐 신고도 갈 수 있게 됐다. 들머리도 한창 정비 중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 협곡까지 내려가는 것이 금지됐지만 바닥을 밟지 않아도 감동은 충분하다. 사위 한갓지니 물소리, 바람소리 맑고 또렷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망대에 서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는 것이 전부. 그런데 심심하지 않고 눈과 귀가 즐겁다. 자연에 동화된다는 것은 이런 거다. ‘내’가 잊힌다. '내'가 사라지니 더위도 못느낀다. 한자리에 서서 30분 이상 멍하니 머물 수 있다.
창수면 운산리의 구라이골(7경)은 훨씬 더 신비롭다. 굴과 바위가 합쳐져 ‘구라이’가 됐다. 역시 한탄강 지류에 형성된 현무암 협곡인데, 폭 좁은 계곡 양 옆에 현무암 절벽이 서있고,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린 것이 정말 계곡을 굴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토록 강렬한 천연함을 느껴본 적 있었던가 싶다. 이러니 풍경은 외계의 것처럼 낯설고 또 무섭다. 아름다움은 가끔 공포감을 안겨준다. 이게 경외감이다.
원시로 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구라이골은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주변 정비가 전혀 안 된 탓이다. 운산정수장 주변이다. 여기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지만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탓에 입구를 찾을 수 없다. 아니 제대로 된 입구가 없다. 나무 헤치고 길을 만들며 푹 꺼진 비탈 아래로 힘겹게 내려가야 만난다. 포천시 관계자에 따르면 올 연말까지 일대가 정비될 예정이라니 이때를 위해 잊지 않고 기억해둔다. 아마도 인기가 비둘기낭을 능가할 거다.
○ 물과 바람의 조각품들
교동가마소(5경)는 비둘기낭이나 구라이골과 달리 아기자기하다. 관인면 중리에 있다. 한탄강 지류에 있는 현무암 계곡인데, 침식작용으로 둥글둥글해진 현무암들이 재미있다. 소 모양이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가마소라고도 하고, 옛날 어렵게 장가를 가게 된 청년과 가마를 타고 가던 신부가 이곳에 빠져 죽었다고 가마소라고도 한다. 제주도 쇠소깍의 축소판 같다. 마른장마에도 물줄기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가 있고 수면 고요한 예쁜 소도 있다. 물길 위로 놓인 다리 오가며 걷다 보면 잘 가꾼 마당 정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 든다.
볕이 너무 뜨겁다 싶으면 영북면 자일리에 있는 화적연(3경)으로 간다. 규모 넓지 않아도 그늘 넉넉한 소나무 숲이 주변에 있다. 강변으로 나가면 거대한 바위의 느닷없는 등장에 눈이 깜짝 놀란다. 바위가 강물 위에 누워있다. 높이가 13m나 되는 높고 넓은 화강암이다. 볏 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이라 ‘화적(禾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용을 닮은 것도 같다. 한쪽 끝은 하늘로 치솟았는데, 용이 머리를 쳐든 것도 같고, 꼬리를 흔드는 것도 같다. 현무암 협곡에 이토록 기이한 화강암 바위가 들어앉았다. 바위 주변은 물이 굽어지며 만들어진 넓은 소. 화적연은 바위와 소가 어우러진 절경이다.
어쨌든 깃든 전설이 용과 관련 있다. 옛날에 3년간 가뭄이 들자 어느 농부가 여기서“하늘도 무심하고 용(龍)도 3년 동안 낮잠만 자나 보다”며 탄식했다. 이러자 물이 왈칵 뒤집히더니 용이 물에서 하늘로 올라갔단다. 그리고 이 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단다. 화적연은 그래서 이후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도 전해진다. 요즘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 일대를 신성하게 여긴다. 소나무 숲 그늘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전설 곱씹어본다. 여름날 여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숱한 시인묵객들이 금강산으로 향할 때 빼어난 경치에 반해 꼭 걸음 멈췄다. 진경산수화로 이름 날린 겸재 정선(1676~1759)도 자신의 서화집 ‘해악전신첩’속에 화적연을 그려 넣었다.
찾기 수월한 곳 하나만 더 추가한다. 창수면 신흥리에 있는 아우라지 베개용암(8경)이다. 한탄강과 영평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주상절리. ‘베개’라고 이름 붙은 것은 그 모양이 정말 배게 여러 개를 쌓아 놓은 것 같아서다. 용암이 굳어지고, 뒤 따르던 용암이 다시 그 틈을 파고들어 굳어지며 이런 모양이 됐다. 이것 역시 흔치 않은 구조다. 이거 잘 보려면 강 건너편 연천 쪽으로 간다.
관인면 냉정리의 대교천 현무암 협곡(1경)과 샘소(2경), 관인면 사정리 멍우리 주상절리대(4경)는 코앞에서 보기가 힘들다.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절벽 위에서 나무 사이로 애써 들여다봐야 보인다. 폭 25~40m, 높이 30m에 이르는 주상절리가 1.5㎞나 이어진다. 부챗살 모양의 방사형 절리가 압권이다. 철원 쪽에서는 협곡 아래로 내려 갈 수 있다. 샘소는 사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 소가 있다는 현무암 협곡이다. 약 3km나 뻗어있다. ‘스카이밸리’펜션 앞마당에서 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철원 쪽에서 래프팅을 하면 샘소를 지나게 된다. 한탄강은 경기 북부 지역의 래프팅 명소다. 멍우리 주상절리대 역시 멀리서 바라 봐야 한다.높이 20~30m 주상절리가 약 4km에 이른다. ‘한탄강 여울길’ 사정리 구간에 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의 축소판 같다. 한탄강 일대를 화려하게 꾸민 자연의 솜씨가 이토록 놀랍다.
○ 여행메모
한탄강 팔경 정리하면, 대교천 현무암 협곡(1경), 샘소(2경), 화적연(3경), 멍우리 주상절리대(4경), 교동가마소(5경), 비둘기낭(6경), 구라이골(7경), 아우라지 베개용암(8경)이다. 다 볼 요량이라면 1경이나 8경에서 시작해 한탄강을 따라 차례로 짚어 가면 된다. 지명은 내비게이션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포천시청 문화관광과 홈페이지에 이곳들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위치(주고)가 나와 있으니 이를 참고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마른장마에 물이 많이 없다. 큰 비 내린 다음 찾아가면 훨씬 신비한 풍경 볼 수 있다. 포천시청 문화관광과 (031)538-2106.
하루 묵겠다면,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안시가 있다. 지난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해 시설 아주 쾌적해졌다. 온천을 이용한 사우나는 피로 풀기 제격이다. 리조트에서 산정호수까지 걸어서 갈 수 있고 평강식물원도 가깝다.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안시 (031)534-5500.
포천=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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