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 전 ‘나꼼수’ 열풍을 타고 대중화한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 등 시사물이 여전히 강세지만, 북카페 개설로 이어진 ‘이동진의 빨간 책방’ 같은 독특하고 깊이 있는 콘텐츠가 적지 않다.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생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영화음악’(정영음)도 꾸준히 사랑 받는 콘텐츠다. 고인의 부친이 녹음해 둔 카세트테이프를 팬들이 3년여에 걸쳐 디지털로 변환해 올린 것인데, 10~20년 전 ‘정영음앓이’로 밤을 지샜던 3040 팬들뿐 아니라, “그 시절 태어나지도 않았던” 신세대들의 가슴까지 적시고 있다.
▦ 1992년 11월 첫 전파를 탄 ‘정영음’은 영화전문잡지 하나 없던 시절, 연예정보가 아닌 영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깊이 있는 분석으로 팬들을 사로 잡았다. 하지만 그를 ‘라디오시대의 전설’로 만든 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 기쁨 따위를 제 목소리로 녹여 전하던 이야기들의 힘이 컸다. 팬들이 추억하는 그의 이름 앞에 늘 ‘아름다운 사람’ ‘정든 님’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 방송진행자로서 고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인터내셔널가’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틀고 노동과 인권, 시국에 관한 강도 높은 발언도 서슴지 않던 그는 95년 4월 마이크를 놓아야 했고, 2003년 10월 다시 시작한 방송도 이듬해 3월 폐지됐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내 마음의 군불이여/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마지막 방송을 열며 ‘처음과 맞닿은 끝’을 꿈꿨던 그는 그 해 8월 4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 고공농성 129일 만에 목숨을 끊은 지 닷새 뒤인 2003년 10월 22일, 그의 오프닝 멘트는 이랬다.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그가 살아있다면 무슨 말로 오늘의 방송을 열었을까. 아름다운 사람의 목소리가 몹시 그립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정은임의 영화음악 팟캐스트 듣기 ☞ http://www.podbbang.com/ch/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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