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새 국왕의 검소한 즉위식 알고보니 누나 돈세탁 혐의 물타기
스웨덴 왕 스트립바 출입 구설수에 유흥업소 소유주 청부살인 의혹도
왕정 존속에 부정 여론 생겨나며 군주제 폐지·재정 지원 중단 시위도
최근 스페인의 새 국왕으로 취임한 펠리페 6세는 즉위식에서 “스페인의 헌법이 의미하는 영토의 통일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11월 카탈루냐 지방에서 진행될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리독립을 막기에 앞서 더한 중책이 있다. 가족을 챙기는 일이다. 즉위 일주일 만에 누나인 크리스티나 공주가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을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의 남편 우르단가린 공작이 비영리법인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600만유로(83억원)를 빼돌려 쓴 혐의를 받고 있다. 크리스티나 역시 연구소 이사회 임원인데다 부동산회사를 남편과 공동 소유해 돈세탁 의혹을 받고 있다. 이미 지난 2월에 크리스티나는 왕실 직계 가족으로는 처음으로 이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출두해 판사의 심문을 받는 등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선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조기 양위와 펠리페 6세의 검소한 즉위식은 추락한 왕실의 인기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갈수록 인기 잃는 유럽 왕실
유럽의 여러 입헌군주국 왕실에서 젊은 국왕들로 세대 교체가 속속 진행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유럽 왕실의 양위 바람은 지난해 1월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이 아들 알렉산더 왕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면서 촉발됐다. 그해 7월에는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가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필리프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가장 최근 사례가 지난 6월 20일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권을 아들에게 양위한 것이다.
향후 세대 교체가 점쳐지는 나라도 여럿이다. 몇 년 전 스트립바에 출입한 사실이 알려져 곤욕을 치렀던 스웨덴 칼 구스타브 16세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청부업자를 고용해 유흥업소 소유주를 살해했다는 구설에도 휩싸였다. 스웨덴 왕실은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눈초리가 고울 리 없다. 게다가 1973년 즉위한 구스타브 16세는 재위 기간만 40년이 넘는다. 최근 방광염 등으로 잇따라 병원에 입원하면서 건강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노르웨이 하랄 5세도 유력한 후보다. 역시 재위 기간이 40년을 넘었고 74세로 고령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여왕도 거론된다.
누구보다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사람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60년이 넘는 재위 기간이나 90을 눈앞에 둔 나이만 보면 유럽 어느 왕실 보다 먼저 국왕에서 먼저 물러나야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당장 양위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다. 영국 왕실은 국왕이 살아 있는 동안 양위를 하지 않는 게 전통인데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건강한데다 대외 활동도 왕성하다. 이혼 후 다이애나비가 비운의 죽음을 맞고, 카밀라 파커블스와 재혼한 찰스 왕세자의 지지도가 바닥을 기고 있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양위를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왕정 존속 고민도 갈수록 깊어져
유럽의 입헌군주제 실시 국가는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리히텐슈타인, 벨기에, 스웨덴 등 모두 12곳. 이중 ‘교황제’를 채택해 교황청과 군주에게 법률 거부권과 내각 해산권을 부여한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하면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입헌군주국의 원칙을 따른다. 실질적인 국가 통치는 총리가 맡고 국왕은 국가의 수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유럽 왕실이 잇따라 세대교체를 하거나 할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은 각국에서 왕정 존속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왕실에 대한 지지는 대체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스페인처럼 경제위기로 국민이 고통 받는 가운데 왕실의 사치 행각 등 도덕적 추문이 불거질 경우 군주제를 아예 폐지하라는 여론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논란이 되는 왕실의 추문과 도덕적인 문제의 유형도 다양하다. 스페인 왕실에 대한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람은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스페인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국민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오던 후안 카를로스 1세였다. 그는 2012년 4월 그가 엉덩이뼈 골절로 수술을 받은 것이 화제가 됐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애인과 코끼리를 사냥하다 넘어졌던 것이 뒤늦게 밝혀져 지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9월 뉴욕타임스가 스페인 왕가의 자산을 23억유로(3조2,000억원)라고 밝히자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영국에서는 왕세손 윌리엄과 케이트 미들턴 부부가 최근 부엌을 고치는 데 든 2억9,000만원을 포함해 집수리에 78억원을 사용하고, 앞서 2012년에 여행 경비로만 11억원을 써 논란을 일으켰다. 스웨덴은 왕위 계승 1순위인 빅토리아 공주가 2000년 결혼식 비용으로 30억원을 지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쏟아졌다. 벨기에 알베르 2세는 40대 여성이 자신의 혼외 자식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난처한 지경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왕실을 향해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정치적인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군주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유럽공화주의운동동맹(AERM)은 “출생을 이유로 신분에 차별을 두고 국가의 최고위직이 능력에 따른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에서 배제된 것은 민주주의에서 용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영국 시민단체 ‘리퍼블릭’도 “봉건시대 잔재인 군주제를 폐기하지 않는 한 진정한 근대국가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유럽 군주제 폐지로 가나
국민의 인식 변화에 맞춰 실제로 군주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 6월 초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스페인 도시 60여 곳은 군주제 폐지 시위로 들끓었다. 남미 도시 30여 곳에서도 이에 지지를 보내는 시위가 벌어질 정도였다. 왕실의 사치 행각과 20%를 넘는 실업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노르웨이에선 지난해 야당이 왕정 폐지안을 의회에 상정했지만 간신히 부결됐고 지난해 4월 네덜란드 왕위 계승 때에는 왕실 폐지 여론이 비등했다.
군주제 폐지 운동과 함께 왕실의 특권과 재정 지원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벨기에는 지난해 처음으로 왕실에 세금을 부과하고 왕실의 급여를 삭감한다는 왕실 재정 개혁안을 승인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전 국왕은 재위 중이던 지난 5월 말 30만유로(4억1,700만원)인 자신의 연봉과, 14만유로(1억9,500만원)인 펠리페 6세의 연봉을 7% 깎았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연간 약 2억파운드(3,430억원)의 예산을 쓰는 영국 왕실도 비판의 대상이다. 영국 하원은 “씀씀이를 못 줄이겠다면 버킹엄궁을 비워 관광 수입이라도 올려야 할 것”이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스페인 정부는 카를로스 1세 퇴직 이후 연금에 대한 입법을 해야 하지만 국내 여론이 워낙 나빠 연금 삭감안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네덜란드에서는 공화주의 운동단체 등을 중심으로 “국왕이 하는 일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을 받는다”며 국왕의 봉급을 삭감하자는 청원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군주제 찬성론자들은 왕실이 국가 단합의 매개가 될 뿐 아니라 관광수익 등 경제에도 기여하는 순기능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는 2012년 여왕 즉위 60주년과 지난해 왕세손 윌리엄-미들턴 부부의 아기인 ‘로열 베이비’ 탄생으로 왕실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전통적으로 왕족의 결혼 등 왕실 행사는 국민의 관심과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일정 정도 국가 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어권과 프랑스어권으로 분열될 위기에 놓인 국가를 통합하지 못하는 벨기에 왕실과 연말까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여부 국민투표가 예정된 영국 왕실은 정치적 통합 기능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입헌군주제가 생존하기 위한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말한다. 왕실이 국민의 기대치에 맞는 도덕성과 행동을 보이면 된다는 것이다. 라르스 호브바케 소렌센 덴마크 코펜하겐대 교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가를 통합하는 데 기여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만이 유럽 왕실이 살 길”이라고 말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