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전쟁을 멈추기 위한 휴전 협상은 전쟁 발발 1년째 되던 1951년 6월 23일 소련 측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보름여 뒤인 7월 10일 유엔군과 중공ㆍ인민군은 개성에서 첫 회담을 열었다. 그로부터 양측은 159차례의 본회담과 수백 차례의 분과회담 등 700번이 넘는 회담을 거친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했다. 2년여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의 살육전은 협정이 발효되는 그 시간까지 계속됐다. 역사상 가장 긴 휴전 협상이며 정전상태가 61년간 지속된 경우도 유일하다.
▦ 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1914년 1차 세계대전은 4년을 끌었다. 20여개 국가가 관여된 이 전쟁을 멈출 방법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3,0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다. 그러다 혁명기의 소련과 서부전선에 집중코자 했던 독일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1917년 12월 독ㆍ소 휴전협상이 시작됐고 4개월 뒤 타결됐다. 연합군의 완승으로 사실상의 종전인 휴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그로부터 8개월 뒤다. 당시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라고 불렀지만 더 큰 규모의 2차 세계대전을 잉태했다.
▦ 영국의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정상회담(Summit)에서 1차 대전을 논하면서 인명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전쟁을 종식시킬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고 했다. 6ㆍ25전쟁의 맹장 매튜 리지웨이 유엔사령관은 중공군을 상대로 전세를 역전시킨 지평리 전투 후 전쟁 양상이 더 치열해지자 “중공군의 깃발을 못 알아볼 정도로 피로 물들게 하라”고 명령했다. 전쟁의 역사로 보면 피의 보복이 가속화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 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7월 28일)을 하루 앞두고 프란체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절대로 더 이상의 전쟁은 안됩니다”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종식을 호소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했다. 최근 6시간짜리, 12시간짜리 휴전에 이어 유엔은 24시간 휴전 연장 안을 제안했지만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난 팔레스타인 측 무장 정파 하마스의 포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무산됐다. 얼마나 더 인명피해가 날지 가늠할 길이 없다. 피를 먹고 자라는 전쟁을 그치기는 어렵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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