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서울 대학로 제과점에서 접한 ‘바게트(Baguette)’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유년시절부터 길들여진 동네 구멍가게의 삼립식품 ‘단팥빵’과는 차원이 달랐다. 길고 딱딱한 막대기 모양부터 신기했고, 식빵을 썰 듯 잘라먹어야 제 맛이었다. 바삭바삭하면서도 짭짜름한 껍질, 부드럽고 쫄깃한 속살은 입에 착 달라붙었다. 초승달처럼 생긴 ‘크라상(croissant)’과 함께 현재도 가장 즐기는 프랑스 스타일의 빵이다.
▦ 와인, 치즈와 더불어 프랑스 식문화를 대표하는 바게트는 지팡이란 뜻이다. 1920년대부터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길쭉한 모양을 따 이렇게 불렸다 한다.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에서 방 굽는 스팀오븐이 등장하면서 개발돼 파리에 전파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절대군주 루이 14세 때부터 둥근 모양이 아닌 긴 빵이 등장했고, 19세기에 현재와 같은 바게트가 출현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길이가 보통 65㎝, 큰 건 1㎙가 넘는 바게트의 역사는 대략 200년쯤 된 셈이다.
▦ 바게트가 국내에 소개된 건 1970년대 초 일본에 유학한 제과기술자들에 의해서였지만, 일반 대중에 알려진 건 1988년이다. 1945년 상미당에서 출발한 SPC그룹(당시 샤니)의 허영인 회장이 그 해 서울 광화문에 정통 프랑스풍 베이커리를 표방하며 ‘파리바게뜨’ 1호점을 냈다. 설탕과 버터, 우유 등을 많이 넣는 미국식 위주였던 국내 시장에서 밀가루와 효모, 정제하지 않은 소금 등으로만 만들어 담백한 식감을 자랑하는 프랑스 스타일은 돌풍을 일으켰다. 샤니는 1997년 국내 베이커리 업계 1위로 등극했고, 2000년대 들어 형제기업 삼립식품을 인수해 SPC로 새 출발했다.
▦ SPC가 최근 바게트의 본고장 파리에 ‘파리바게뜨’를 오픈했다. 2004년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미국 싱가포르에 진출한 뒤 8년 준비 끝에 파리에 입성했다고 한다. 고급 매장은 테이블이 없는 프랑스식 대신 한국식 ‘카페형’으로 꾸몄고, 생크림 케익이나 햄ㆍ치즈로 만든 조리빵 같은 한국식 제품도 내놓아 현지 점포들과 차별화했다. 까다로운 파리지앵의 입맛을 공략해 글로벌 1위 제빵 기업으로 도약하는 게 목표란다. 원조보다 더 원조다운 바게트로 유럽에 문화충격을 안기며 새로운 식문화 역사를 쓰기를 기대한다.
박진용 논설위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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