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시신을 정밀 감식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어제 “시신의 부패가 심해 사망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서중석 국과수 원장은 브리핑에서 “독극물 분석과 질식사, 지병, 외력에 의한 사망 여부 등을 분석했으나 대부분의 장기가 손실돼 사인을 판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서 원장은 이어 “DNA 검사와 신체 특징 등을 분석한 결과 유씨 시신이 100% 확실하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변사체가 유씨임은 틀림없지만 사망한 원인은 규명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국과수가 사망 원인을 밝혀내지 못함에 따라 유 전 회장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쉽사리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과수의 브리핑은 세간에 떠도는 온갖 설과 의혹을 의식해 상당히 이례적으로 진행됐다. 통상 감정을 의뢰한 수사기관에서 내용을 발표하는 것과 달리 국과수가 직접 브리핑에 나섰다. 시신 사진과 분석 자료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권위 있는 민간 법의학 전문가들을 참석시켜 의견을 개진토록 한 것도 보통 때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서 원장은 “오로지 과학적 지식과 방법으로 진실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서 “이번 발표를 통해 많은 불신과 오해가 해소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과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인 규명에 실패함에 따라 의혹을 완전히 잠재우기는 어렵게 됐다. 지병을 앓고 있는 유씨가 도주해 탈진이나 지병, 혹은 사고로 사망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거나 목 졸려 숨졌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게 됐다.
검찰과 경찰의 허술한 수사가 다시 한번 도마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경찰이 지난달 12일 변사체를 발견했을 때 초동수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사망 원인을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유씨 시신을 살펴본 법의학자들도 한결같이 발견 당시 경찰의 시신 관리와 감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검찰도 전남 순천의 별장에서 유씨를 못 잡은 것은 고사하고 지난달 26일 ‘벽장 피신’ 진술을 받은 뒤 바로 경찰에 알렸더라면 인근 야산 집중 수색으로 유씨 시신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유씨 사인을 규명하는 것은 다시 수사당국의 몫이 됐다. 사인 규명은 시신 부검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유씨 행적과 현장에서 얻은 단서를 함께 분석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검찰과 경찰은 부실 수사 책임과는 관계없이 사인 규명 등 남은 수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유씨 사망에 직ㆍ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변 인물들을 조속히 검거하는 것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유씨의 사망 원인 규명은 이 사건에 쏠리는 국민적 관심과 의혹을 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바닥에 떨어진 공권력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도 전력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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