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수사 부실 현장 증거확보 못해 정황·유류품 의존한 재수사 불가피
유씨 지팡이도 수거했다가 분실… 간접증거만으로 진척될지 회의적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망 원인 규명은 다시 경찰 몫으로 넘어 왔다. 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식에서도 유씨의 사인을 특정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나오지 않아 현재 진행 중인 경찰의 재수사만이 유일한 진상 규명 통로가 된 것이다.
국과수가 정밀 감식을 통해 밝혀낸 것은 유씨가 독극물과 흉기에 의해 숨지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시신이 심하게 부패된 점 때문에 목졸림 등 타살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경찰은 타살과 자살, 자연사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채 사실상 원점에서 사인을 파악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됐다.
이날 국과수 기자회견장에 나온 강신몽 가톨릭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사인을 밝히는 일은 행적과 현장 증거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부검과 같은 직접적 규명 수단이 아니더라도 시신 발견 당시 현장 증거만 확실히 확보했다면 사망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초동 수사가 부실투성이여서 시신과 현장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증거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경찰은 지난달 12일 유씨 시신을 발견했을 때부터 ‘무연고 변사자’로 간주해 사체가 유씨일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다. 당연히 현장 보존이나 증거 수집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시신 최초 발견 당시 사진을 보면 사체 주변의 풀이 누워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정상적인 초동 수사라면 이런 현상이 부패가 진행하면서 시신에서 흘러나온 체액에 의한 결과인지, 아니면 유씨 본인이나 제3자의 흔적이 반영된 풀의 쏠림 현상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만일 이 곳에서 유씨의 족적이 나오면 도주에 따른 자살이나 자연사로 사인 범위를 좁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사본부가 꾸려진 전남경찰청 측은 변사 신고 직후 족적 채취를 했느냐는 질문에 “들은 바가 없다”며 증거 수집 노력이 없었음을 시인했다.
변사 현장에 대한 접근 제한 조치도 유씨의 신원이 확인된 이달 22일 새벽에야 이뤄졌다. 이때는 이미 시신 발견 40일이 지난 뒤였다.
경찰은 유씨의 유류품 관리도 소홀히 했다. 최삼동 순천경찰서장은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변사 현장 사진에는 분명히 (유씨의) 지팡이가 있는데, 회수 과정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며 분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또 현장에서 수거한 유씨의 머리카락에 대한 DNA 분석을 의뢰하지 않아 국과수가 뒤늦게 자체 분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경찰은 정황이나 유류품 등에 의존해 사인을 추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전남청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유씨를 체포하기 위한 은신처 파악에 주력했다면, 현재는 흔적 찾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변사체 발견 장소와 송치재 인근 별장 주변을 정밀 수색해 스쿠알렌이나 육포 껍질 등이 수거되면 유씨의 동선이 파악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간접 증거 만으로 수사가 진척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호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차 검시 때 경찰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현장에 법의학자 등 전문가를 동행했다면 다른 의견이 개진됐을 것”이라며 “시신 자체가 늦게 발견된데다 시간도 많이 지나 사인 규명이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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