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는 정의가 아니다. 외려 정의를 구축(驅逐)한다. 의리가 득세한 사회에서 넘쳐나는 건 가짜 정의다. 상대화한 정의는 불신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면 다시 믿을 건 오직 의리다.
“개인적으로 세월호 사건의 원인은 “부정의한 구조를 만들어가는 특정 캐릭터(인성)의 범람”이라고 생각한다. (…) ‘세월호’는 안전사고지만 안전 이슈라고 보는 것은 안이한 시각이다. 안전은 사건화 과정의 명명일 뿐이다. (…) 최근 우리사회의 독특한 문화 현상인 ‘의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나(만)를 지켜준다는 기존 안전 개념의 산물이다. (…) 지금 우리사회는 의리와 정의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 정의는 양심의 소리지만 의리는 힘센 자의 기호를 따른다. 정의는 모든 이에게 적용될 것을 전제하고 추구하는 일반 규범, 도리다. 정의(正義)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고뇌에서 시작되지만 의리는 ‘정(情)’에서 출발했다가 길을 잃는 심리 구조다. (…) 의리는 강자의 힘이 낭만화된 언어다. 있는 자들의 카르텔, 이것이 의리다. 더 많이 가지려는 집단들이 힘을 합쳐 약자의 밥상을 걷어차는 폭력의 담합, 즉 강자의 의리는 약자의 정의를 짓밟기 위한 것이다. (…) 지금처럼 리더에게 의리를 갈구하는 것은 황당할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의리는 본래 선별적으로 작동한다. ‘하나회’, 학벌, 지역주의가 그것이다. (…) 정의에는 냉소를 보이는 반면 의리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엉뚱한 의리를 낳았다. (…) 정의는 논쟁적이지만 의리는 사적인 인연이기 때문에 조건만 맞는다면 무조건적인 안도감을 준다. (…) 나는 이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 ‘세월호’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와 의리(경향신문 ‘정희진의 낯선사이’ㆍ여성학 강사) ☞ 전문 보기
“우리나라는 정의(正義ㆍjustice)의 레토릭이 넘쳐나는 사회다. (…) 그러나 ‘바를 정(正), 옳을 의(義)’의 합성어인 정의가 언제나 바르고 옳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 정의는 분명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최소한 유병언 일파와 이석기 일당은 그렇게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세력이 스스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의 객관적 사실성과 규범적 정당성이 공론 영역에서 철저히 검증되어야만 한다. 자기 성찰을 거부하는 정의는 주관적 망상이거나 선전선동일 가능성이 크다. 최악에는 검증되지 않은 정의는 정의라는 이름의 테러를 동반하기도 한다. (…) 정의로 가는 길은 불의로 전락하는 길과 섞여 있으며 역사의 피바람은 정의의 레토릭과 동행하기 일쑤였다. (…) 그녀의 폭로 내용 핵심은 1ㆍ2심 재판부에서 ‘허위이거나 사실적 오류’로 판단되었다. 정의의 사도(使徒)를 자처한 권은희씨가 정의의 제1 준거인 사실성을 정면에서 위반한 것이다. 비사실적인 주장은 대선 부정을 고발한 도덕적 정당성도 허문다. (…) 결국 권은희씨는 정의의 이름을 함부로 일컬음으로써 정의를 참칭하고 정의를 희롱하고 있는 셈이다. (…)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출발점은 정의의 무서움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이다. (…) 정의감을 남용하거나 오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항상 직시(直視)해야 한다. (…) 완벽한 정의 실현을 꿈꾼 마르크스의 이상이 현실사회주의의 숨 막히는 불의로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 교훈이다. 정의의 첫걸음은 정의를 참칭하는 자들을 추방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의를 참칭(僭稱)하는 者들(조선일보 기명 칼럼ㆍ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 전문 보기
대중의 간접 인식(認識)은 당국과 전문가의 권위에 기댄다. 인식론 매개 없이 존재론은 불가능하다. 스모킹 건이 모조일 가능성은 상존한다. 지식의 근원적 한계를 권력은 활용한다.
“2010년 5월20일,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합동조사단에 의해 밝혀졌다. 조사단은 북한이 쏜 어뢰가 천안함을 침몰시켰다고 했다. (…)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조사단은 침몰 현장에서 발견된 어뢰 추진부를 높이 들어올렸다. 사람들은 놀랐다. 추진부 뒷부분에 ‘1번’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 그 후에도 좌파들은 수많은 의혹을 제기했지만, 국방부는 말없이 가운뎃손가락 하나만 들어올렸다. ‘1번’이란 글자는 그만큼 확실한 증거였다. 2014년 7월21일 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노숙인의 것으로 생각했던 시신이 뒤늦게 유병언의 것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 서로 다른 사람의 DNA가 일치할 확률은 최소한 30억분의 1이니, DNA 한 방이면 유병언이 맞다고 할 수 있겠다. 4년 전처럼 좌파들은 여기에 대해 숱한 반론을 펴고 있다. 유병언은 술을 안 먹는데 왜 가방에 소주병이 들어 있느냐부터, 시체의 키가 유병언과 다르다는 식이다. 아니, 공부 안 하는 학생도 책가방에 책이 들어 있고, 가수 임창정의 키가 프로필에 적힌 대로 171㎝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 1번 어뢰와 유병언 시신 확인은 둘 다 배와 관련이 있다는 점, 과학수사의 개가라는 점, 좌파들이 결정적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지만, 둘 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게 가장 신통하다.”
-북한 어뢰와 유병언의 공통점(경향신문 ‘서민의 과학과 사회’ㆍ단국대 의대 교수) ☞ 전문 보기
“확실한 건 그가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죽음 앞에 낭설이 분분하고 음모론이 창궐한다. 어떤 괴담과 유언비어가 나돌아도 정부는 할 말이 없게 됐다. 검찰이 경찰을 속이고 경찰이 검찰을 의심하는 판에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으라고? (…) 유병언은 영락없이 토끼몰이에 내몰린 산토끼 신세였다. (…)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범인을 지목하는 게 손쉬운 법이다. 한 사람에게 몽땅 책임을 뒤집어씌우면 골머리 썩을 일도 없고 책임질 사람도 줄어든다. 그런데 원인을 탐색하지 않는 사회에선 같은 문제가 자꾸 되풀이된다. 구조적인 문제, 시스템의 오류는 고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병언 토끼몰이’는 그래서 후진적이다. 정부의 무능을 숨기고 책임을 덮기엔 더없이 좋은 가림막이었겠지만 말이다. (…) 사실 유병언의 죽음은 세월호 사건의 본질과 한참 떨어져 있다. 온 나라가 유병언 토끼몰이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모두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거다. 이제 그만 ‘유병언 미스터리’에서 눈길을 돌렸으면 한다. 그리고 제 발로 걸어나온 이들 외엔 아무도 구조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이며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찾아내는 데 관심을 쏟자. 유병언에게 쏟은 공력의 십분의 일이라도 말이다.”
-누가 유병언을 죽였는가(한겨레 ‘아침 햇발’ㆍ임석규 논설위원)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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