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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거쳐간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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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거쳐간 사람들은?

입력
2014.07.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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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것을 자축하는 뜻에서, 독립협회가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세운 것이다. 일제가 이 곳에 형무소를 지은 데에는 위세를 과시하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3ㆍ1운동 직후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해 조선인 3,000여명이 한꺼번에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김좌진, 손병희, 안창호, 김구 등이 이 곳을 거쳐갔고 유관순 열사는 악형 끝에 순국했다.

해방 후 서대문 형무소의 수감자 변천사는 혼란스런 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반민특위의 검거 활동으로 친일파로 가득하던 형무소는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압박하면서 금세 또다시 독립운동가들로 채워졌다. 제주 4ㆍ3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은 일부 여성 수감자들이 이곳에 갇히기도 했다. 북한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점령한 뒤 반공ㆍ친미 성향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대거 투옥하고 후퇴 당시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한강 다리를 파괴하고 피난해 서울시민들을 고립시켰던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와 북한에 협조한 이들을 가두고 일부는 사형에 처했다.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 정도가 좌익으로 분류된 인사였다.

사형 제도는 종종 독재 정권을 위협하는 존재를 제거하는 사법살인으로 악용됐다.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고 1975년 유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우고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한 일도 있었다. 그밖에 육영수 저격범 문세광, 박정희 저격범 김재규의 사형을 집행한 곳도 서대문 형무소였다.

고경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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