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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사법살인 인정했지만... 역사관엔 "독재정권 조작사건" 몇 줄뿐

입력
2014.07.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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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정치적 맞수 제거하려 국보법 위반·간첩 혐의 씌워

대법원 재심청구 기각 바로 다음날 구속 1년 반 만에 형장의 이슬로

형무소 의왕시로 옮긴 뒤 역사관 건립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 기록으로 채워

독재정권들 과오는 희미한 흔적만

죽산 조봉암이 간첩 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법정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죽산 조봉암이 간첩 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법정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이 함께 활동한 적이 없는 데다 공산당 활동 경력이 있는 죽산을 장관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군정과 합의했거나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이 함께 활동한 적이 없는 데다 공산당 활동 경력이 있는 죽산을 장관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군정과 합의했거나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죽산 조봉암이 55년 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앞에서 아들 조규호씨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나무가 '통곡의 미루나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에 대해 "이미 모두 용서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죽산 조봉암이 55년 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앞에서 아들 조규호씨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나무가 '통곡의 미루나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에 대해 "이미 모두 용서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1959년 7월 31일 아침. 큰딸 조호정씨는 사촌오빠 조규진씨와 서대문 형무소로 아버지 면회를 갔다. 면회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오늘은 몸이 불편해서 면회를 못 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서 나왔다. 아버지인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1898~1959)이 이날 세상을 떠났다는 건 사형이 집행된 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중략)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명백한 사법살인이었는데도 모든 언론이 침묵했다. 며칠 뒤 한국일보가 1단 6행짜리 단신 기사를 건조하게 내보냈을 뿐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승만의 경찰이 무고한 조봉암의 목에 오랏줄을 매어 정적을 말살했다”고 썼다.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사법부는 52년이 지난 뒤(2011년 1월 20일 무죄선고)에야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조봉암과 이승만은 동지에서 출발해 적으로 끝났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이승만에 의해 농림부장관에 기용됐으나 이념과 노선 차이로 결별했다. 그는 농림부장관 재직 시절 소작제를 철폐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하며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했다. 농민에게 특히 인기가 높아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부정 투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얻은 500만표의 절반에 가까운 216만표를 얻었다. 선거 후 진보당을 창당한 그는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며 이승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냉전과 미국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던 이승만은 위기를 느꼈다.

조봉암은 1958년 1월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 1심에서 간첩혐의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유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검찰의 항소와 압박에 서울고등법원은 간첩죄를 얹어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허위자백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법원은 이를 무시했다. 이듬해 대법원마저 사형을 확정했다. 변호인단이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7월 30일 기각했고 홍진기 당시 법무부장관은 다음날 사형 집행을 명했다. 구속 후 1년 6개월 만에 이뤄진 사형이었다.

죽산의 아들 조규호(65)씨는 “재판을 생각하면 요즘도 가끔 잠을 설친다”고 했다. 2011년 내려진 무죄선고 판결을 국가가 다시 뒤엎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이의 아들이 살고 있는 현재다. 그와 함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땅을 디뎠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찾았다. 그는 “처음 와본다”고 했다. 죽산은 투옥 당시에도 이승만 정권이 아들을 해코지할까 봐 면회를 못 오게 했다. 여태껏 이곳에 오지 않았던 이유를 물어도, 감회를 물어도 조규호씨는 엷고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독립문을 뒤로 하고 걷다 서재필의 동상을 지나면 서대문 형무소에 닿는다. 형무소라는 단어 자체를 이제는 쓰지 않지만 이곳은 그것이 갖고 있는 상징성과 역사성 때문에 여전히 서대문 형무소로 기억된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려고 1908년 만든 경성감옥은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12년 서대문 감옥으로, 다시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해방 후엔 서울형무소(1945),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거듭 바뀐 뒤 1987년 의왕시로 이전함에 따라 문을 닫았고 1998년 역사관이 개관했다.

현재의 역사관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형무소와 몇 채의 옥사를 제외하면 원래의 모습이 거의 사라져 일제와 친일파 정권이 민중을 80년간 탄압했던 현장을 느끼기엔 부족하다. 죽산과 서대문 형무소의 첫 인연은 3ㆍ1운동이 있었던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 스물이 갓 넘었던 그는 강화도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는데 “1년 동안 감옥살이 하는 동안 전연 딴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싸우는 일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 곳, 서대문 형무소는 그에게 두 번째 삶을 시작한 곳과 다름없었다. 죽산은 간수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만세를 부르다 기절하곤 했다. 결국 그는 일본과 맞서 싸우던 곳에서 친일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아쉽게도 일제가 패망한 1945년에 멈춰 서 있다. 일본이 독립운동가를 가둬놓기 위해 만든 형무소를 해방 후 독재 정권이 민주 투사들을 겁박하는 데 활용했다. 때론 일제보다 악랄했다. 역사관에는 그 흔적이 몇 줄 설명 외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진보당 사건: 독재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야당인 진보당 간부들이 간첩들과 접선했다고 조작하여 탄압한 사건. 1959년 7월 31일 위원장 조봉암 사형’.

역사관을 둘러보고 있던 김수진(27)씨는 “조봉암이라는 이름만 들어봤을 뿐 어떤 분인지 잘 몰랐다”며 “정치인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뜻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 관람객은 “이곳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부실해 (앞서 관람하고 지나간) 저 외국인들이 뭔가를 느끼기나 했을지 모르겠다”고 씁쓸해 했다. 해방 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식도 편협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저서에서 “맹목적인 반일 감정을 키우는 데 머물고 있다”면서 “고문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고문에 대한 전시는 ‘엽기’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썼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한국의 지배 체계를 대변하는 상징적 건물이다. 옥사 구조는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 방식으로 지어졌다. 중앙에서 360도로 수형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다. 감독관이 개인의 행동과 상태를 감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중앙집중형 공간구도인 파놉티콘은 감옥, 공장, 정신병원 등에 주로 적용됐다. 감시와 처벌을 수형자에게 내재화해 억압과 착취를 일삼았던 방식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자본주의와 독재정권에 이식돼 노동자와 국민의 복종을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근대 감옥의 특성이 일제 침략은 물론 현재의 지배체계에까지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뜻이다.

100년의 현대사 속에서 감시와 처벌, 억압과 착취, (진실의) 축소와 은폐를 상징하는 장소가 된 서대문 형무소를 지금 사방으로 에워싸는 담벼락은 고층 아파트 단지다. 정부에 의해 공원으로 변모한 역사의 현장을 대기업이 건설한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인근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주민들이 운동하러 공원에 많이들 나와요. 서울 시내 진입이 수월한 데다 강남으로 바로 통하는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 가까워 선호도가 높은 편입니다. 인왕산도 가깝고, 살기 좋은 곳이죠.”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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